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4) 대만영화



1895년. 그러니까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발명을 한 해에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타이완)을 획득하게 된다. 정확히는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는 일본에 양도 되었고 타이완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51년간 근대화와 식민지화를 병행하여 진행했는데 이때 영화의 보급도 함께 병행하였다.



워낙 대만의 역사가 기구하고 고산족 등 원주민들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본어 보급과 대만인들에 대한 선무공작 차원에서 인류의 신발명품인 ‘영화’는 가장 효과적인 문화적 장치였던 셈이다. 하여 대만이 일본영화사와 함께 진행되게 되는데 1901년 타이베이에서 일본인 다카마쓰 도요지로(高松豊次郞)가 최초로 영화를 상영하는 한편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대만 전체를 순회하게 된다.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음을 감안 할 때 대만에서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매우 이른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촬영된 것은 1921년 일본인 하기야(萩屋)가 방문하여 ‘곽란(癨亂, 토사광란)예방법’이라는 식품 위생 교육 계몽 영화를 만든 것이 대만 최초의 촬영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만 1907년 타이베이에 최초의 상설영화관이 들어섰지만 일본 영화가 상영되었고 대만의 대중오락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영화제작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만의 공식 역사 기록으로는 ‘1922년 대만 총독부 내무부에서 사회 사업을 위해 일본 영화를 구입하고 대만을 여행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1925년 5월 23일 일련의 영화청년들에 의해 ‘대만영화연구협회’(台灣映畫研究會)가 조직 되었다.



이들 멤버는 이송봉(李松峰), 정초인(鄭超人), 이연조(李延祖), 강정원(姜鼎元) 등이고 대만에 거주 하는 일본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들 중 대만 최초의 사진작가로 평가 받는 이송봉이 제작자겸 스틸기사로 나서고 유희양(劉喜陽)이 감독을 정초인 등이 배우로 나서서 ‘누구의 허물’(誰之過, Who’s over)가 만들어져 대만 영화의 효시로 꼽히게 된다.



다만 대만의 공식 역사기록을 보면 그해 9월 대만영화연구협회가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만인 자체의 영화제작이 많이 위축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이들이 본 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부였을 가능성이 높기에) 일본의 신파와 활극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어서 서로 연인사이인 기생과 은행원이 건달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은행원이 기생을 구출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다만 아시아 각국의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사라지게 되는 운명이었듯이 ‘누구의 허물’ 역시 필름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만영화연구협회는 대만에 영화의 새싹을 틔우고 이국적 정서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본영화인들과 교류를 한 측면이 있다. 1921년 총독부에도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필름의 사용을 위해 영화 연구소와 부서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1924년에는 일본영화 ‘부처의 제자들(佛陀の瞳, 大佛的瞳孔)’이 촬영됐는데 몇몇 일본배우를 제외 하고는 대만에서 현지 배우를 위한 오디션도 진행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대만영화연구협회의 설립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만을 소재로 한 일본영화는 있었다. 1919년 에다마사 요시오(枝正義郞)가 덴카쓰에서 제작한 ‘슬픈 노래’가 바로 그것으로, 도쿄에 사는 어린 소녀가 유괴 되어 서커스단에 팔려가 세월이 흐른 후에 대만의 원주민 고사족(高砂族) 추장의 딸로 성장한다는 내용의 멜로 드라마다.



에다마사 요시오가 실제로 로케이션을 했는지에 관한 논쟁은 있지만 당시 가장 근대적 수법과 영화적 기술을 배합한 영화라는 점과 순영화극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 그리고 대만이라는 주변 국가에도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록에 의하면 1924년의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한 이후 1938년 ‘망춘풍(望春風, 봄바람)’을 내놓기 이전까지는 대만영화는 주로 일본과의 합작에 의존하였고 이 역시 ‘국경 없는 협력’이라는 기본사상이 깔려 있었고 1920년대에는 일본을 통해 일본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가 수입 되고 본토의 샤먼(廈門)이나 타이난(臺南)을 통해 비록 검열을 엄격하게는 했지만 상하이 영화가 수입되기도 하여 대만에서도 영화제작에 관한 싹은 틔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27년에는 닛카쓰의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가 ‘아리산의 귀여운 아이’를 촬영하면서 실제로 대만 현지 올로케이션을 했다. 이 영화는 고산족 청년에 대해서 매우 긍지 높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에 힘입어 대만 영화인들도 대만영화사 ‘백달영편(百達影片)’의 장운학(張雲鶴)감독이 ‘혈흔(血痕)’에서 산악지대인 ‘반카이(潘界)’의 교역소를 무대로 남장한 소녀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멋지게 갚는 이야기를 통해 대만인들에게 이국적 정서의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계몽사상과 이국적 정서의 융합이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아주 적합한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융합은 1932년 대만의 안도 다로(安藤太郞)가 제작한 ‘의인오봉(義人吳鳳)’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사족이 목을 베는 관습을 폐지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물이 되기를 자청하는 양심적인 대만인의 이야기를 그려 미개에 대한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주인공이 유교의 이상적 인격을 구현해 냄으로써 일본의 정서와는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시미즈 히로시(淸水宏)의 ‘사욘의 종(鐘)’에서는 대만은 이미 야만인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이향란(만에이의 아이돌)이 연기한 고사족 소녀는 철저히 ‘황국신민화’되어서 마을에서 출정 병사를 위해 헌신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자기를 희생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대만은 홋카이도(北海道)에 이은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이지만 식민정책의 성공적 안착에도 불구하고 1941년 총독부가 대만영화협회를 다시 설립하여 관리·통제 하면서 활발한 제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대만 영화들이 흥행 참패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출신들(대륙, 토착 한족, 일본, 고산족 등 대만 원주민, 혼혈)이 모인 까닭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기 보다는 일본 영화인들에게 고용되거나 합작 등을 통해 명맥만 유지해 나갔다.



다만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하여 대만에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할 당시 즉시 일본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려고 했으나 즉각 대중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국민당 정권이 영화업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대만의 전후 경제가 빈곤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오기 힘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적 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대만의 경우 일본의 변사에서 유래하여 대만의 젊은 세대들이 일본영화를 상영할 경우 대만어 설명자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즐기고는 했는데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북경어로 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대만어를 사용하고 객가어(客家語, 중국 남부 광둥(廣東), 광시(廣西), 푸젠(福建), 장시(江西) 등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언)를 사용하는 일반 대만인들에게는 좀처럼 친숙해지지 못했다. 1946년 중미우호조약 체결 이후 미국영화가 대부분 유통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대만어로 된 민간영화가 나와 인기를 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의 경우 1970년대 (중공수교에 의해) 국교단교가 일어나기 전까지 대중적 지지로 합작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오념진(吳念眞)감독의 자전적 영화 ‘아버지(多桑)의 한 장면에서는 소년 시절의 감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탄광 마을의 영화관에서 쇼치쿠의 영화 ’당신의 이름은‘(君の名は, 1953)을 통역자의 해설과 더불어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다 케이지, 키시 케이코, 아와시마 치카게가 주연한 이 영화는 젊은 커플이 2차 세계대전의 공습 하에 도쿄의 수키야바시대교에서 만나게 되는데 둘은 반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통속적 신파극이었다.



이처럼 일본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만에이 출신과 상하이 출신들이 유입되면서 대만영화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일본의 문화와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찾아 볼 수 없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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