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드라이버>와 <분노>가 생각난다.
1
아서는 엄마가 주입하던 대로
'해피'하고 싶었다.
조명을 받는 일(코미디언)이
그렇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다.
다른 얘기지만
조명은 빛을 다루는 일이다.
하지만 어둠도 잘 알아야
피사체를 잘 보여줄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그동안 조커를 비추던
조명의 세기를 낮춘다.
대신 그 뒤의 그늘진
아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어디에 걸쳐져 있는지
확인하게 한다.
그의 고단하고 높은 담을.
2
영화는 조커의 전사를 다루지만
사회현상들의 전사를 다루기도 한다.
그래서 조커라는 희대의 빌런에
심정적 동의를 구한다.
미국에서 모방범죄를 걱정할만 하다.
조커 이전에 아서의 맨얼굴은
다름아닌 우리의 실제 삶이므로.
3
영화가 비추는 그의 분칠된 얼굴은
우습지도, 무섭지도 않다.
서글픈데, 그가 불쌍하지도 않다.
모호하다.
안티테제에 대한 권위의 위선은
밝은 걸까 어두운 걸까?
왜 고담시의 공중보건이 무너졌을까?
아서의 얼굴을 뒤덮은
그 창백한 웃음 역시
위선이라기도,
위악이라기도 어렵다.
아니, 애초에 웃음이라 할 수가 없다.
4
분명한 건, 세상사는 대체로
불분명하더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아서와 대비되는 브루스,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일지도.
지난번 기생충을 보고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또 어울리는 것 같다.
좌절과 절망,
저 절로 이어진 오늘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