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독일 외교부 문서 공개가 되면서 알려진 사실인데 다른 나라 언론에 보도가 잘 안 된 것 같다. 동독이 무너지려 할 때 중국이 손을 뻗치려 했었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중국의 유럽통이 이탈리아가 아닌 동독이 됐을지도?
그 뿌리는 천안문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경 천안문의 1989년 여름은 정말 뜨거웠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밀어버리고 “질서와 안전”을 회복했었다. 당시 동독 외교부 장관이었던 Oskar Fischer는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에게 “중국과의 연대”를 표방하고 사회주의의 안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최근의 반사회적 열정의 시도를 비난했다. 심지어 2주일 후 최후의 동독 서기장이 될 에곤 크렌츠가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었다.
중국을 이렇게 강력히 지지하는 나라는 정말 많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소련도 중국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때가 1989년 10월 얘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때가 11월 9일이다. 이미 당시 동독에서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 20여만 명이 속속 나라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참조 1). 여행 허가 없이 그냥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빠진 다음, 오스트리아나 서독으로 들어간 것이다(참조 2).
10월 27일, 중국은 북경 주재 동독 대사를 불러 제안을 한 가지 하고, 동독 대사관은 그 내용을 본국에 전문으로 보낸다. 제안을 듣자마자 말이다.
“…원하는 수만큼 능력 있는 중국 노동자들을 보내드리겠음. 금전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정치적 도움임. 다만 그 값은 제품으로 보내주면 좋겠음.”
에곤 크렌츠 서기장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28일, 그러나 그는 빠져나가는 동독인들 처리에 정신 없었다. 그래서 총리 역할을 맡고 있던(참조 3), 빌리 슈토프(Willie Stoph)에게 이 전문이 전달된다. 이때가 10월 30일이었다.
슈토프는 중국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서구 통화를 대가로 지급할 필요조차 없다니! 중국측이 동독을 방문해서 관련 부처와 함께 필요한 협정을 체결해 보자는 내용으로 전문을 보내고자, 동독 외교부로 문서를 보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외교부로 바로 전문 내용을 보냈건만…
독일의 관료주의도 이상하게 힘을 발휘한다. 빨간 “지급(Eilt)” 도장도 찍혀있었건만 11월 1일에서야 동독 외교부는 해당 공문을 받았다. 게다가 동독 외교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최후의 평양 주재 동독 대사를 지내게 될 Klaus Zorn은 이미 918명의 중국 계약 노동자들이 콤비나트에서 일하고 있는데(참조 4) 더 들여오려면 조건을 좀더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1월 2일, 슈토프는 다시금 내각 회의를 소집하는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위에 썼지만 11월 내내 동독인들은 동독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논의할 여유가 없었고, 며칠 후 동독 내각은 모두 사표를 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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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Massenflucht(2016년 2월 29일): https://www.hdg.de/lemo/kapitel/deutsche-einheit/wandel-im-osten/massenflucht.html
2. 인상적인 역사적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겐셔 서독 외교부 장관이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동독인들을 구하는 장면이다.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을 막기 위해 동독 정부는 체코에게 동독 사람들 나가지 못 하게 하라 부탁했었지만, 겐셔가 아예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체코 주재 독일 대사관 발코니에 섰다. 내가 당신들 데리러 왔노라고.”
한스 디트리히 겐셔(2016년 4월 3일): https://www.vingle.net/posts/1508089
3. 정확히는 정부 내 각 부처를 아우르는 내각의장(Vorsitzender)이 더 가까운 번역어일 테지만 보통의 경우는 그냥 ‘총리’로 번역한다.
4. 동독도 서독처럼 구인난이 좀 있어서 중국만이 아니라 베트남 노동자 59,000명, 모잠비크 노동자 15,000명, 쿠바 노동자 8,300명이 당시 동독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8년 당시 동독 내 외국인 노동자는 93,500명 정도였다.
모두 공동생활을 했는데 지금과 비슷하게(…) 일상적으로는 차별당하기 일쑤였고 동독인들이 저지르는 혐오 범죄의 대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