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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이다. 이번에는 백만 년이라도 기다리겠다는 각오로 왔다. 앞에 대기자 두 팀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금방 자리가 났다. 대기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붙은 행사 알림 액자를 보았다. ‘학림다방 오십주년 기념 망년 육일간’ 말 그대로 연말에 육일 간 있을 명사들의 행사계획표가 적혀 있었는데, 초대 손님 중 황지우 시인도 있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알고 보니 2006년 행사다. 벌써 13년 전의 행사였다니. 나는 대략 6년 만에 이곳에 왔다. 사실 몇 달 전, 올해 초 양재동의 닭집에서 내게 쌍욕을 했던 자와 오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대기자들을 보고 그냥 돌아갔었다. 그와 대기해가며 이곳에서 분위기를 잡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넓은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시심에 취해있거나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이곳의 유명한 크림치즈 케이크를 입안에 한 스푼 밀어 넣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6년 동안 변한 게 없구나. 물론 얼핏 보기에 그러한 것이겠지만. 끝끝내 자리에 남아 버티는 것이 결국 이기는 거구나. 6년 만에 왔으니 이곳은 내게 6년이라는 시간이 쌓여있는 곳이다. 2006년 망년 행사에 처음 왔던 사람에게는 이곳이 13년이라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고. 50년이 넘는 시간을 쌓아 올린 이곳이지만, 이곳은 단순히 50여 년의 시간만을 간직한 곳이 아니다. 이곳을 방문한 모두의 시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곳이다. 오래된 장소는 그곳에 잠시라도 머문 모든 자들이 시간을 예치해놓은 시간 은행 같은 곳이다. 이곳도 초기에는 별다른 것 없는 다방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무섭게 변해가는 동안 그대로 남아 유명한 다방이 되었다. 단순히 버틴 게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버틴다는 것, 견딘다는 것은 생각보다 위대한 일이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이기는 자가 남는 것이 아니라 남는 자가 이긴다는 말. 정말 맞는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변해버렸나.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다짐, 무슨 일이 있어도 시 쓰기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 그런 것들이 여전히, 변함없이 내 안에 있나, 그런 생각도 해본다. 물론 100% 그대로 변함없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가령 50년이 넘은 건물을 유지하려면, 너무 낡은 곳은 보수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변함없기 위해 전략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시인이니까, 시를 써야 하니까, 어떤 직업도 갖지 않고, 시만 쓸 거야, 라고 한다면, 결국 가장 빠른 속도로 시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시가 아닌 것들과 손잡기 위해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무엇보다 내가 차마 겪어보지 못한 나를 찾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런 여정이 없이 시는 써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많은 나를 찾아가느라 시와 멀어진다면, 그렇다면 시를 떠나보낼 용의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나는 시를 그렇게 내 안에 내내 남겨 놓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앞에는 거꾸로 매달린 와인 잔들이 보인다. 접시를 닦는,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종업원과 눈이 마주친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배우 감우성이 엄정화를 기다리던 KFC 매장이 그대로 있다. 이런 것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버릇처럼 나는 지금을 떠올릴 훗날을 상상하고 있다. 이런 몹쓸 미래 중독. 사실 오늘은 창극 『패왕별희』를 보려다가 예매에 실패하여, 아쉬운 대로 오랜만에 대학로에서 상연 중인 연극을 보러 왔다가, 잠깐 이곳에 들렀다. 특정한 연극이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소극장에 가고 싶었다. 그럴 때가 있다. 소극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고,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는 작품이 무엇인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사소한 이유들을 사랑하고, 사소한 것에 인생을 거는 일들을 좋아한다. 오늘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예치하러 이곳에 왔다. 벌써부터 이 시간이 불려줄 엄청난 추억들이 기다려진다. 학림다방. 때가 되면 나는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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