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역사를 크게 크게 본다면, 현대 세계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즉, 근대의 마지막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이유도 있고, 워낙에 제2차 세계대전이 깊은 인상(!)을 남겨서 그런지 제1차 세계대전(혹은 La Grande Guerre)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크리스마스"같은 영화, 혹은 참호에서의 떼죽음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승리자(!?)인 나라들은 그러하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라자르 폰티첼리(Lazare Ponticelli)가 110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프랑스는 국장으로 대우했다. 그의 관은 외인부대(폰티첼리는 이탈리아인이었다)가 들었고, 관 뒤를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과 시락 전 대통령 부부가 따랐으며, 상하원 의장, 총리 등등 주요 인사가 다 참석했고, 장례식은 생방송됐다. 오바일까? 베테랑, 그러니까 참전용사에 대한 극진한 대우는 승전국과 패전국을 나누는 기준이며,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는 기준이기도 하다. 극진한 대우를 해야 후세가 보고 배워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어땠을까? 폰티첼리가 죽기 몇 개월 전, 제1차 세계대전 독일군으로 복무했었던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ästner)도 108세로 사망했었다. 그 장례식을 취재했던 것은 독일이 아니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의 방송국/신문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한쪽의 괴멸적인(!?) 패배 없이 끝난 전쟁이라서, 순수하게 숫자만 따지자면 러일전쟁과 비슷하다. 누가 졌다고 하기 힘든 전쟁이었다. 여기서 잠시 역사로 들어가 보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3국 연합과 3제 동맹의 충돌이기는 했지만, 주요 전선으로는 역시 독일-프랑스/영국의 서부전선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의 동부전선이었다. (아시아 쪽 전황은 금세 끝났다. 그 유산이 아마 칭따오 맥주) 동부전선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더 복잡해졌지만, 서부전선은, 슐리펜 계획부터가 시작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현재의 미국처럼, 두 개의 전쟁을 공격/방어의 형태로 하여 한쪽을 해결한 다음, 신속하게 다른 한쪽을 해결한다는 독일의 작계였다. 실제로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서부와 동부를 동시에 쳤었다. 프랑스에는 작계가 없었나? 1870년의 설욕을 벼르고 있던 프랑스에게도 당연히 작계가 있었다. 플랑 17이라고, 강력한 사기를 바탕으로 한 승전이었다. 여기서 오해가 붙는데, 정신승리를 외치며 닥치고 돌격한다는 내용이... 어떻게 보면 오해는 아니지만, 그 내용이 자세하게 붙어 있었다는 점은 다들 빼먹는다. 플랑 17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 벨기에에서 방어를 하면서, 알자스 고지대에서 독일을 침공하며, 강력한 화력을 동원하되 "사기"를 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닥치고 돌격이 물론 들어 있기는 하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작계를 만들었던 수뇌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플랑 17이 바로 그런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수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Entente cordiale" 덕분에 영국군도 합세할 수 있게 됐으니, 당연히 잘 될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계산 착오가 일어났다. 슐리펜 계획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화력을 잘못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속도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개전한지 얼마 안 돼서 독일은 이미 벨기에를 통과해 버렸다. 그렇다면 알자스 고지대에서 곧바로 "총공격"을 했으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동원한 화력이 독일에 훨씬 못미쳤다. 다행히도, 알자스에 배치됐던 프랑스 북부 집단군(집단군, 하면 왠지 독일군 스러운 냄새가 나지만 goupe militaire라고 하므로 적절한 번역이다)은 철수를 했고, 전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선은 이미 파리를 향해 확대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주력 부대가 둘로 나뉘었다가 사이를 격파당하는 바람에(마른 전투), 그 후부터 전투는 참호전으로 양상이 바뀌어버렸다. 그때부터 하루 수 천 명씩 죽어 나가는 전투가 지속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가 떨어져 나가고, 미군이 참여했으며(갑자기 상대방 전력에 300만 명이 추가됐다고 생각해 봐라), 독일 내부에서의 사회 소요로 인하여 빌헬름 2세는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수 백 만 명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고, 다양한 비인간적인 신무기(비행기, 전차, 독가스 등)가 등장했었다. 인류의 존엄을 해친 전쟁으로서 기억해야 할 테지만, 다시 앞으로 돌아가건데,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뒤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국가사회주의당의 (합법적인) 정권 장악,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폰티첼리는 대단히 겸손했다. 팡떼옹 안장을 거절하고, 자신이 아닌 "무명 용사"들을 기원해줄 것을 부탁한 다음, 가족 묘에 묻히기를 원했던 폰티첼리는 이 전쟁의 비극을 정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슈피겔 기사대로 프랑스는 크게 이겼던 자존심의 회복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전투를 알아 보면 위에서 보듯 프랑스가 그리 크게 자랑할 것이 많지 않다. 폰티첼리같은 개개인들의 겸손한 말을 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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