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오는 공포썰] 사이비 종교 끝장낸 썰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많이 떨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 크네

그릇된 믿음 때문에, 여러모로 뒤가 구린 사이비 종교 하나 때문에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구나.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져서 마스크 값이 폭등하고, 마트에 생필품도 다 떨어졌다면서.

사실은 이 정도로 공포에 떨 것이 아닌데.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 무서운 건 역시나 불필요한 혐오인 걸. 벌써부터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 걸 보니 두통이 다 생기더라. (물론 신천지 혐오는 인정ㅋ)


그래서 오늘 가져온 건 (조금 많이 길지만) 우리나라의, 잔인하기로는 비할 바가 없는 한 사이비 종교 이야기야. 정말 어마어마해서 영화화도 된 지라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혹여 지금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가져온 글.


글이 너무 길어서 내가 중간 중간 좀 솎아 냈는데도 여전히 기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은 두꺼운 글로 표시를 했어. 다 읽기 싫은 사람들은 두꺼운 글자만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그럼 시작해 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이 거칠고 강퍅할수록 종교는 힘을 얻는다. 일제의 강압이 날로 심해지던 1930년대, 피폐해진 식민지 백성들의 신산한 마음을 뚫고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 가운데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것이 수백건의 살인과 음행이 드러난 이른바 ‘백백교 사건’. 그 참담한 최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건의 배경에 가난과 무지, 정치적 부자유에 시달린 반도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5년, 유곤용은 해주에서 가장 큰 한약국 ‘구명당(求命堂)’의 주인이었다. 본디 그의 집안은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휴양지로 번성한 신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재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색이나 주색에 빠진 것도, 투기나 도박에 손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유곤용의 조부는 수시로 땅을 팔고, 빚을 얻었다. 유곤용이 해주로 나올 즈음 유씨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했다.


유곤용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비방으로 약을 처방했는데, 특히 위장병, 임질, 뇌신경질환 치료약 조제에 탁월했다. 10여 년의 관록이 붙은 후 그의 명성은 황해도를 넘어 경기도와 평안도에 뻗쳤다. ‘구명당’은 조선 최초의 한약재 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유곤용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933년 임종하기 전, 조부는 유곤용에게 30년간 지켜온 집안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할아비는 장차 너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근 30년간 백백교를 믿어왔다. 대원님께 의지하여 재물 버리기를 초개와 같이 했다. 그러나 아쉬워 말거라. 할아비가 정성을 다해 교에 바친 재물은 이제 곧 몇 곱절, 몇십 곱절이 되어 네 아비와 네게 돌아올 거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허망하게도 조부가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탓이었다.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교주의 애첩이 된 누이동생 또한 백백교의 열성 신도가 됐다.


-


유곤용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아버지 유인호의 처소를 찾았다.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원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곤용은 어떠한 곤란한 명령이라도 순종할 터이니 제발 대원님을 승안케 해달라며 거듭 부탁했다. 그제서야 유인호는 자식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유인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월16일 저녁 8시 왕십리 유인호의 자택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유곤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용해의 애첩이 된 유정전은 오빠 유곤용에게 대원님을 승안할 때 다섯 가지 계율을 명심해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첫째, 절대로 대원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 대원님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됩니다. 둘째, 대원님을 뵐 때는 몸에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셔야 합니다. 수건 하나 휴지 한 장이라도 주머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셋째, 백지장 같은 결백한 마음으로 대원님을 대하셔야만 합니다. 넷째, 대원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만 대답을 여쭙지 오라버니 편에서 무슨 말씀이고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째, 대원님께서 내리시는 분부면 어떠한 것이건 절대 복종을 하셔야만 합니다.”


교주 전용해는 약속한 정각에 애첩 유정전과 부하 두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유곤용은 부친과 함께 뜰 아래로 쫓아내려가 공손히 대원님을 영접했다.


방안에 모여 앉은 얼굴과 얼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교주 전용해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따지고 보면 자네와 나는 4년 전부터 처남매부지간인데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구려.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반갑소.”


간단한 인사말이 있은 후 주연이 벌어졌다. 한잔 두잔 술잔이 거듭됨에 따라 전용해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이미 서울에 와 있으니 차라리 그대도 가산 전부를 정리해가지고 서울로 오는 것이 어떠한가?”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백백교는 교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정조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비밀 유지를 위해 수백명의 교도를 살해, 암매장한 것이었다. 너무나 흉악한 범죄였기에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했다.


소위 교주된 자와 그 간부가 되는 자들은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낚아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 그 비밀을 막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교도 중에서 피살된 자가 사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현재 판명된 자만도 158명에 달한다.


전국에 산재한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모두 314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자택에서 교도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도 사체를 자전거에 싣고 백주에 종로와 남대문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내달렸다.


깊은 산골에 세운 비밀 아지트는 금광으로 위장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렸기에 바로 인근 주민들조차 그곳이 금광을 가장한 ‘도인장(屠人場)’임을 까맣게 몰랐다.

죽을 때 비명이 새어나갈까 우려돼서 화약을 함께 터뜨렸다고 한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 하고 대성통곡했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을 믿는 교도들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했던 전용해는, 유곤용과 다툰 지 닷새 만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白道敎)를 개창했다. 교도가 1만명을 헤아렸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세 아들이 모두 독립해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둘째아들 용해는 차병간을 표면상의 교주로 내세워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백백교를 창립했다.


백백교의 교세는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한풀 꺾인다.


-


“일제는 가고 새 세상이 온다”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나무위키)


각 교도는 헌성금(獻誠金)의 다소와 인물의 능력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될 것이다.”


교도들은 자산을 팔아가지고 상경하라.


일반백성은 모두 물에 빠져 죽더라도 헌금한 우리 백백교도는 금강산 피신궁(避身宮)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신입 교도가 가지고 온 현금을 헌납하게 했다. 미모의 처녀가 있으면 ‘시녀’로 바치게 했다. 시녀에게 ‘신의 행사’를 빙자해 욕정을 채웠다.‘믿음이 약해’ 교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심복 간부에게 넘겨줬다.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렸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오면 기존의 시녀 중 ‘믿음이 약한’ 시녀는 양주, 양평 등지의 심산에 사는 심복 교도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교주는 한 달에 몇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며 시녀들과 ‘신의 행사’를 치렀다.


전 재산과 자녀를 교주에게 바친 교도에겐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 교도들은 화전을 일궈 근근이 연명했다.교도들이 근처 부락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가족의 신변 걱정에 교도들은 차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다.교도를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산 채로 암매장됐다.


범죄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


문봉조가 공범자와 함께 죽인 사람이 49회에 129명, 이경득이 61회에 166명, 길서진이 48회에 169명, 길군옥이 34회에 121명, 이한종이 11회에 35명 등이다. 마치 사람 죽이는 것을 병아리나 죽이듯 쉽게 여겼다


재판장이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9명의 피고인이 살인 및 사체유기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장은 사건을 최초로 고발한 유곤용의 부친 유인호를 일으켜 세우고 신문에 들어갔다. 장로 유인호는 백백교 30년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재판장: 어째서 백백교를 믿었느냐?

불로장생 호의호식 한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이 창설한 백도교에 관계했느냐?

유: 예, 그때부터 믿었습니다.


재: 무슨 동기로?

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백도교를 믿으면 모든 재액을 피할 수 있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이냐?

무식해서 교리는 모릅니다.


재: 헌성금은 얼마나 바쳤느냐?

전재산을 모조리 바쳤습니다.


네 딸을 전용해의 첩으로 준 이유는 무엇이냐?

선생께서 요구하기에 바쳤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14일자)


이어 벽력사 문봉조에 대한 신문에 들어갔다. 문봉조는 백백교의 행동대장격으로 49회에 걸쳐 129명의 교도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재판장: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인가?

선생께서는 신이 사람의 모습을 쓰고 내려온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재: 헌성금이란 어떤 것인가?

입교한 자는 자기 재산을 팔아 교주에게 바치도록 했습니다.


재: 검거 당시까지 얼마나 받았는가?

문: 알 수 없습니다.


재: 전용해가 교도에게 돈을 준 일이 있는가?

문: 생활이 가난하면 얼마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재: 생활이 곤란한 교도 중에는 교주에게 불평을 품은 교도도 있었겠지?

믿음이 엷은 교도 중에는 혹 불평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불평분자는 모두 피고인들에게 명령해서 죽이게 했다지.

예, 그랬습니다.


교도 중에서 딸이나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에게 그 딸과 누이동생을 바치라 해서 첩을 삼았다지

문: 정확한 명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앵정정에만 34명 있었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는 매일 술만 먹고 첩과 음탕한 생활을 해왔다지?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월계관’이나 ‘백학’ 한 되쯤씩 자셨습니다.


전용해는 자기 재산은 없이 교도에게서 모은 돈을 물 쓰듯

문: 예.


재: 그런 음탕한 생활을 하는 전용해를 어떻게 신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었는가?

술 먹은 때는 그렇지만 선생께서 가르치는 말은 모두 훌륭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재: 그래, 아직도 전용해를 신의 아들로 믿는가?

지금 생각하면 모두 어리석어서 속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문봉조를 비롯한 피고인 전원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고 했지만, 교주를 지칭할 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불평을 품고 있을 때마다 교주가 “이 놈 네가 불평을 품고 있구나. 다른 데 가고 싶거든 가거라” 하여 독심술을 가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23명의 교도를 살해한 이창문은 백백교만 믿으면 가족의 병도 낫고 또 불로장수하는 줄만 알고 입교했으나 교주가 자칫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무서워 도망까지 해보았지만 교주 밑에 남기고 온 처자의 목숨이 염려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


1940년 3월15일, 수은주가 영하 7℃까지 떨어지고 연 이틀 눈이 내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314인의 원귀가 내린 저주라 말했다. 때늦은 혹한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제2회 공판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진행됐다. 314건의 살인혐의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무주군 설천면 야산에서 목매 죽였는가?

이경득, 길서진: 예.


재: 이유는?

모릅니다. 대원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입니다.


20세가량의 여자와 그 젖먹이 애를 죽였나?

예.


(중략)


재: 1931년 5월 교주의 첩 문봉례를 죽일 때 업고 가던 젖먹이도 죽였는가?

문봉조 : 문봉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는 안 죽였습니다. 대원님께서는 애까지 죽이라 하셨지만 이경득이가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젖 먹다가 어미를 잃은 계집애 처지가 하도 가련해서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있습니다.


문봉례를 죽인 이유는?

오빠를 죽인 것을 알까봐 죽이란 것이었습니다.


재: 어째 친형인 문봉진과 그 가족을 죽였는가?

만일 형을 안 죽이면 나도 죽겠고 내 가족 친척도 남모르게 죽겠기에 형을 죽였습니다.


피고인들은 아녀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애, 친형까지 대원님의 명이라면 서슴없이 도륙했다. 사흘 후 속개된 제3공판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계속됐다. 심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살인 사실을 한 묶음 두 묶음씩 통틀어 심리했다. 피고인이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다. 몇 가지 혐의에 대해 부인해도 판결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0건의 살인혐의 중 99건의 혐의를 부인해도 판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평분자 본인만 아니라 한 가족 전부를 몰살먹여 살리기에 귀찮다든가 한 장소에 너무 많은 교도가 있어 경찰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 죽인 교도도 적지 않았다.


검사는 살인과 관련된 18인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은 가담 정도가 경미한 피고인 4명만 징역 7~15년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14명에게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으면서 많이 놀랍지 않아?

지금 '그' 종교의 실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야.

물론 살인까지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라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약해져 있고, 제대로 된 법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니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 있었겠지.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서 나중의 구원을 약속한 후 재산을 다 헌납하게 하고, 가족까지 끌어들이고 여색을 취하는 게 정말이지 어떤 종교와 같지 않아?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주고, 처음부터 순박하면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노리는데다 사바사로 그가 혹할 말로 꼬드기고, 게다가 마음 먹고 빠져나오려고 해도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어서 힘든 일인 것 까지.


저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밝혀진 것만) 몇백명을 살인했기 때문에 모두 큰 벌을 받게 되었지만 지금의 종교는 어떨까. 훨씬 더 교묘하게 사회에 파고 들어 있어서 잘 걸러내 질 지도 모르겠네.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여 아직도 '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해.


그들은 너를 구원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너의 심약한 마음을 부풀려 잡아 먹는 괴물들일 뿐이니까.


참고로 사형을 선고받은 저들에게 실제로 사형이 집행이 됐는지는 몰라. 직후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아.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 일제는 범죄형 두개골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서 포르말린에 절여 범죄형 두개골 표본으로 만들었다고 해. 정말 일본은 박제하는 걸 좋아하지 참?


해방 후에는 국과수가 (이유도 모른 채) 보관하고 있다가 2011년에야 화장을 했고. 약한 사람들 마음을 좀먹고 살았던 사이비 교주의 마지막은 이 정도로 비참해야지. 암.

무서운 이야기 좋아하는 겁쟁이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