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벤츠

주말 특집, 또 하나의 벤츠와 커피 필터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의 발명품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이 커피 필터다. 상당히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졌는데, 이제 100년 정도 됐고, 발명가가 세운 회사는 여전히 세계 커피 필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빨간색 회사 로고로 유명한 멜리타(Melitta)이다.


이 종이 필터의 발명가는 여성이며 그녀의 이름이 바로 멜리타 벤츠(Melitta Benz, 1873-1950). 원래는 드레스덴에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였고, 남편은 백화점 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여느 중산층 집안과 마찬가지로 당시 전유럽에 유행이었던 커피를 그녀도 아침마다 마셨는데, 생각해 보시라. 두 남자 아이와 한 명의 여자 아이, 그리고 다 큰 남자 아이(…남편)를 챙기고 학교 보내고 직장 보내고 하려면 정신 없다.


그런데 이 커피를 내리는 일이 당시로서는 힘들었다. 많이 퍼져 있던 여과기(이를테면 프렌치 프레스)로 커피를 내릴 때는 가루가 그대로 커피 잔에 들어가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하여 전통적인 여과 방식인 린넨 천으로 커피를 내리자니, 이걸 설거지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귀찮았다는 얘기인데, 그녀는 이것 저것 필터 테스트를 해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당시 초딩이던 큰아들의 노트북 용지(Löschpapier, 참조 1)를 빼다가 내려봤더니, 이 “종이”가 꽤 괜찮았다. 그래서 “오후 커피 타임(참조 2)”을 만들어서 주변 아주머니들 대상으로 테스트를 했고 평가가 좋자, 곧바로 베를린에 가서 제국특허청에 특허 등록을 하고 회사를 세운다. 이 때가 1908년이다. 남편은 곧바로 백화점을 그만 두고 아내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중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남편과 큰아들이 둘 다 징집됐었지만 돌아온 다음 그들은 다시금 멜리타 벤츠의 사업을 돕는다. 오히려 멜리타는 이때 커피필터만이 아니라 관련 제품들로까지 사업을 확장시켰다.


이 종이 필터는 종래의 필터보다 훨씬 간편하고 위생적이면서 맛도 좋았다. 물론 실제로 제일 우월한 부분은 간편함과 가격이다. 비슷하게 볼 여지가 있는 천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고, 한 번 쓰고 버리는 간편함은 달리 비교할 것이 없었다. 회사는 고속 성장을 거듭한다.


하지만 고속 성장이 좀 문제였다. 종이 필터를 만들던 드레스덴의 집이 곧 비좁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큰 곳을 찾아 드레스덴 내에서 여러 곳을 이사 다녔지만 벤츠 부부에게 손을 내민 곳은 독일 서북쪽의 Minden이었다. 5년간 부동산세를 포함한 재산세, 그리고 매출세를 면제한 것이다(참조 3). 이 지역에서 멜리타는 1929년부터 1980년까지 필터를 생산했다.


더 큰 문제는 나치의 집권이었다. 당시 독일 내 규모가 큰 여러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멜리타도 전범기업이라 부를 수는 있다. 멜리타는 나치를 지지했고, 작은 아들은 나치 당원이기도 했으며 후에 SS에도 들어갔었다. 게다가 이 회사는 1941년부터 43년까지, “국가사회주의 모범기업(Nationalsozialistischer Musterbetrieb, 참조 4)”에 지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지지를 안 했던 모양인지, 전후 있었던 전범재판에서 잘 빠져나갔고(기록에 따라 벌금을 냈다는 주장도 있다), 해당 지역을 점령했던 영국은 공장을 다시금 벤츠 가족들에게 되돌려줬다.


그리고 청년들의 데모와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았던 1960년대, 멜리타는 주40시간을 도입한다(참조 5). 이미 1930년대부터 주5일제와 3주간의 유급휴가를 실시하던 곳(참조 2)이었으니 주40시간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사의 고됨을 아는 분이 창업주이니 이런 면은 아마 회사 역사 내내 잘 지켜졌던 듯 하다.


멜리타는 여전히 가족 경영을 지키고 있다.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인지, 독일 공정거래위(Bundeskartellamt)에서는 “커피 카르텔(Kaffeekartell)”, 그러니까 가격 담합 혐의로 2008년과 2011년, 멜리타와 Kraft, Dallmayr 등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적이 있었다. 역시나 멜리타는 당국에 협조를 잘 해서 그런지 벌금을 부과받지 않았다(참조 6).


여전히 멜리타는 커피 필터 및 커피/차 관련 제품만 집중하고 있으며, 코로나19 위기 관련하여 필터 생산 시설을 마스크 생산으로 돌리기도 했었다(참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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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보통 블로터(blotter 혹은 blotting paper)라 부르는 종이다. 만년필이 퍼졌을 때 주로 사용하던 종이인데, 요새는 잘 안 쓰이는 느낌이 있다. “압지”라는 표현도 있다. 영국 노포크의 한 제분소에서 발명했다고 한다. http://www.norfolkmills.co.uk/Watermills/lyng.html



2. Overlooked No More: Melitta Bentz, Who Invented the Coffee Filter(2018년 9월 5일): https://nyti.ms/2MTg4Fd



3. 회사 사이트의 1920년대 설명에 나온다. https://www.melitta-group.com/historie_en.html



4. 나치 당 외곽조직 중 하나로서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끈 독일노동자전선(DAF)의 “노동의 아름다움 사무소(Amt Schönheit der Arbeit)”가 지정한다.


올해의 모범기업 정도의 뉘앙스를 갖지만 사실 그 내용은 멀쩡하다. 회사 내 구내식당, 노동안전장치, 화장실과 휴게실, 도서관 설치 등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5. https://de.wikipedia.org/wiki/Melitta_(Unternehmen)



6. Geldbuße für Cappuccino-Kartell(2011년 10월 19일): https://www.abendblatt.de/wirtschaft/article108145107/Geldbusse-fuer-Cappuccino-Kartell.html



7. 일반인 판매용은 아니다. Melitta starts production of millions of face masks(2020년 4월 9일): https://www.melitta-group.com/en/Melitta-starts-production-of-millions-of-face-masks-3661.html



8. 짤방은 1938년부터 지금까지 형태가 바뀌지 않은 멜리타의 커피 필터다.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Melitta_(Unterneh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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