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1) - 해체 위기에 선 일본호

일본에 철강산업 따윈 필요 없겠지요. 기껏해야 연간 300만 톤 정도 있으면 되나요? 그 정도는 미국에서 공급하면 되지요.

전후 일본을 사실상 점령 통치한 연합국 사령부, 일본에서 GHQ라고 부르는 미군정부 인사 하나가 패전 직후 일본 관료들 앞에서 했다는 얘기입니다. 거꾸로 뒤집어 얘기하면, 앞으로의 일본에선 제철소 단 하나도 구경할 일 없을 거란 뜻이나 다름없었죠. 그 자리에 있던 일본측 인사들 안색이 어떠했을지는 안 보고도 짐작이 갑니다.


맥아더의 GHQ는 애초 일본을 완전히 이등 국가로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1945년 9월 미 국무부가 쓴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엔 이런 언급이 있었죠.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 등 경제적 기초는 파괴되어 재건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생활 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


미군정이 내놓은 조치들은 과감하고 상당히 진보적이었습니다. 전통적 재벌 그룹을 해체하고 그 중심에 있던 지주회사들을 폐쇄했고, 몇몇 산업체를 팔아치워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려 계획했죠. 또 농지개혁을 통해 전통적 소작제를 붕괴시켰습니다. 경찰을 지방 자치 조직으로 분권화했고, 사법부에서 검찰 조직을 떼내어 권력을 나누었죠.


노동자들에게는 노조 결성과 파업의 자유를 제공했고, 공산당을 합법화한 것도 맥아더의 군정부였습니다. 또 전통적, 봉건적 가족제도를 보장해온 민법상 규정들을 뜯어고치면서 여성에서 참정권을 주었죠. 새 헌법과 내각도 사회당 중심의 혁신 내지 중도주의 노선이 주도하도록 미국의 입김이 미쳤습니다. 오죽하면 같은 GHQ 내에서도 민정국이 일본을 공산화하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을까요?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긴 건 처음부터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니까요. 소련의 바로 턱밑에 강력한 우방이 있다면 미국에게도 무척 든든했을 겁니다. 중화민국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동맹이 된다면, 일본을 지금처럼 재무장할 필요도 없었겠죠.


당시 일본은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구의 3, 4%에 이르는 사상자들, 국부의 1/3을 상실했고, 한반도 등 식민지에 의존해 온 식량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미군 식량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죠. 젊은 판사가 아사하고, 메틸 알콜을 섞은 싸구려 술과 암시장이 공공연히 돕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은 한때 539%라는 믿기지 않는 수치를 찍었고, 매춘과 저질 오락 잡지인 가스토리 잡지가 성행했죠. 사카구치 안고가 '타락론'을 발표하는 등 일본 퇴폐주의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국공내전 결과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밀려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륙에서 파트너를 잃은 미국은 새삼 동아시아에 밀려오는 공산화 물결에 겁을 집어먹었죠. 그들 눈엔 흡사 오래전부터 가설로만 존재했던 도미노 이론이 실재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련, 그리고 중국. 그 다음엔 남한과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몰랐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 결과 GHQ는 정책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일본을 재무장시켜 최소한 유사시 미군의 보급 기지가 될 수준까지 만들고,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더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란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죠. 미국에겐 일본을 통치할 체제를 아예 백지부터 새로 세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 불안, 노조 운동의 과격화, 5월 수립된 사회당내각 등으로 인해 미 군정부는 만약 일본 경제 재건에 실패한다면 일본 또한 공산화될 거라고 우려했죠.


미국의 정책목표는 '민주적 일본이 스스로 힘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자유세계에 참여토록 준비시키는 것'


1948년 10월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불과 3년 사이에 일본에 부여한 역할이 완전히 바뀐 셈이죠. 침몰하던 일본호는 이때 완전히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진정으로 회복하기까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GHQ의 무리한 정책, 종전 후 최대 정재계 비리 사건, 또 GHQ가 일본에 이식한 미국 기술의 싹이 어떻게 일본 토양에서 왕성하게 자라났는지 등.


이번 시리즈에서 할 얘기는 1970, 80년대 황금기 일본을 탄생시킨 체제와 거장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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