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2) - 야만을 넘어 음모론의 시대로

에드워드 머레이 대령, 일본은행에서 시가 20만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500개를 훔쳐 미국내로 밀반입한 혐의를 인정해 10년간 노역과 불명예 전역을 선고받음.

1947년 5월 29일 마데라 트리뷴을 비롯한 미 언론사는 위 판결 내용을 신문지면상에 실어 보도했습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당사자 에드워드 머레이는 미군이 장악한 일본 은행에서 압수된 다이아몬드를 몰래 숨겨 들여오려다가 적발된 바 있었죠. 당시 그의 품에선 다이아몬드 500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시가로 하면 총 20만 달러에 이르렀죠.


일개 장교가 훔친 게 수백 개나 된다면, 대체 패전국 일본엔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었던 걸까요? 이런 의문은 비단 미국인들만 품은 건 아니었나 봅니다. 1960년 일본의 국민 작가라고 일컫는 추리소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검은 안개>라는 논픽션 책을 써서 미군정 시기 미해결 사건들에 대해 다룹니다. 이 가운데 한 꼭지가 바로 일본은행 다이아몬드에 대한 내용이죠.


다이아몬드와 관련되어 처벌받은 건 머레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군정 소속 대위 레이몬드 크레이머를 비롯해 초기에 참여했던 장교 수십명이 부패 및 횡령 혐의로 검거되거나 경질되었죠.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패전국가가 보유한 어마어마한 금액의 비자금을 손에 넣었단 소문이 그래서 돌았던 모양입니다.


속칭 M자금이라고 이름붙은 이 음모론적 가설을 뒷받침하는 얘기는 또 있습니다. 1946년 4월 제보를 받은 미군정이 도쿄만 엣츄시마의 해저에서 금괴 54톤을 비롯해 백금, 은괴 등을 수거합니다. 제보자는 사실 구 일본군 병사들로, 상사의 명을 받고 제 손으로 묻은 보물들을 자진 신고한 거죠. 미군정이 내건 포상금을 노리고 제보했다고 합니다. 이 일에 대해 일본 정부 및 연합군사령부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습니다.


엣츄시마 해저 보물 인양 등으로 인해 일제가 식민지 및 본국에 막대한 자금을 감춰뒀다는 식의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돌았습니다. M자금, 야마시타 골드 등등... 심지어 지난 2018년 태국이나 필리핀 등지에서도 구 일본군이 매장한 금괴가 현지인들에게 발견되었다는 등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간간히 나오나 봅니다.


이전 글에서 미국이 일본을 재무장해 공산주의 물결을 막는 방파제로 삼으려 했단 언급이 있었는데요. 그 일환으로 1947년 부흥금융금고라는 제도가 실시됩니다. 일본 정부가 부흥금융채를 발행해 재원을 마련한 후, 그것을 에너지, 중화학공업 등 주요 산업 육성에 정책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내용이었죠. 이 금고의 자금이 실제로는 정부 채권이 아닌 M자금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M자금의 M도 당시 일본 노동, 금융, 경제 및 과학기술 분야를 지휘감독하던 경제과학국의 국장 윌리엄 마케트의 머릿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었고요.


패전국 일본의 은닉 재산은 미군정 하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47년 11월, 소위 은퇴장사건 수사부가 검찰내에 설치되는데요. 이는 패전 후 혼란 속에 육해군 및 정부관계기관 보유 물자가 은닉되거나 빼돌려졌다는 부정 의혹을 수사 적발해낼 목적으로 세운 조직이었습니다. 1949년 도쿄지검 내 정식 출범한 검찰특수부는 바로 이 은퇴장사건 수사부의 후신이죠.


M자금은 비록 음모론 수준의 이야기지만, 부흥금융금고는 실제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정책적인 목적에서 투입한 자금이니만큼 빌려준다고 표현은 했지만 실제 회수계획은 유명무실이나 다름없었죠. 거기다 미군정 및 관료 조직이 이 막대한 자금 융자에 권한을 가졌으니 자연히 재계와 관료들 사이에 유착이 발생합니다. 업체로부터 접대를 받고 뇌물을 받았단 인물이 미군정 내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래 나올 쇼와 덴코 사건을 일으킨 비료 회사 쇼와 덴코의 본사. 회사는 그 뒤에도 계속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화학제품, 전자소재 사업 등 고부가사업 위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크고작은 사건들을 더 겪긴 했지만요.


결국 1948년 '쇼와 덴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처음 중의원 내 특위에서 처음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후 경시청 내사를 통해 공개수사와 압수수색이 실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죠.


처음 경찰이 수사하던 사건은, 이후 미군정의 지시로 검찰이 수사를 전담하도록 바뀝니다. 미군정은 당시 경찰의 수사 정보가 계속 누설되는 것에 반감을 가졌고, 뒤이어 경찰관계자도 접대를 받은 인물이 있어서 수사를 얼버무린다는 등 의혹이 제기되어 수사 주체를 경찰에서 검찰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검찰은 도쿄지검 차장검사 지휘 아래 문제가 된 비료회사 쇼와 덴쿄 임직원을 조사했죠. 그리고 이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습니다.


처음엔 사용처 불명인 자금 흐름을 찾아 회사 사장과 임원진을 추궁하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장 히노히라가 자백을 하게 되죠. 이 자백을 토대로 대장성 대신인 구리스가 전격 체포됩니다. 뒤이어 국무상 니시오가 수사망에 오르게 되는데요. 이 인물은 당시 내각 연립정권의 구성원에다 부총리를 지낸 사회당 의원이라 파장이 컸습니다. 결국 니시오는 뇌물 100만 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죠.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수상 아시다는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시다 수상 본인도 별도 뇌물 수뢰 건으로 체포되고 말죠. 아시다는 예전에 정부납품의 대금 지급이 지연되어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을 만나, 대장상과 전쟁부흥원 총재를 소개해주는 대가를 수취한 바 있었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된 겁니다.


7개월간 이어진 수사기간 동안 이 초유의 뇌물 증수뢰 사건에 얽힌 인물은 현직 장관 1명, 전 장관 2명, 현직 의원 6명, 전 의원 3명, 공무원 10명에 은행원 8명, 쇼와 덴코 사원 7명, 관련 회사원 21명 및 기타 6명에 이릅니다. 이중 경찰이 기소를 결정한 사람 수만 해도 무려 43명이나 됐죠. 기소된 인원 가운데엔 내각 총리, 부총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총 14년 6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비로소 결실을 보았죠. 결과는 기소된 인물 대부분이 무죄에 그나마 유죄라도 실형 선고받은 인물이 없이 끝났습니다. 가령 쇼와 덴코 사장 히노하라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받았지만, 2심에선 1년으로 감형됐고, 그나마도 상고심에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으로 줄었죠.


재판 결과가 이렇듯 맹탕으로 끝난 주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수뢰 혐의를 받은 인물들이 뇌물을 받는다는 인식이 없었단 것, 또 하나는 청탁 내용과 청탁을 받은 인물의 직무 사이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죠. 총리인 아시다조차도 직무권한과 무관하게 돈을 수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은 거죠.


내각은 국가의 행정사무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안건에 대해서만 심의하며 개별, 구체적 사항은 내각 스스로 처리할 권한이 없다.


어처구니없는 판결 탓인지 이 사건에도 으레 그렇듯 음모론이 따라붙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아시다 연립내각과 미군정, 그리고 미군정 내 파벌 다툼에 관한 음모론이었죠.


처음 GHQ는 사회당 중심 혁신 내지 중도주의 정권을 지원했지만, 이후 정치불안이 가중하면서 선거에서 보수정권인 요시다 내각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정치불안은 요시다정권에서도 지속했죠. GHQ는 전후 최초 중도주의 내각인 가타야마 내각을 지지해 출범시키지만 불과 8개월만에 단명합니다. 이때 연립정권 구성으로 정권교체를 막아낸 게 바로 아시다 내각이었죠.


문제는 GHQ 내에서 아시다 내각에 대한 의견이 갈린 것이었습니다. GHQ 민정국과 경제과학국은 아시다 내각을 지지했죠. 민정국은 일본의 정치민주화를 진행하고 민간인 구성원이 대다수였습니다. 경제과학국 역시 재벌해체 등 경제민주화를 주도하고 약 500여 명의 경제학자, 기술자, 전직 경영자 등을 거느린 조직이었죠. 이들을 비롯해 GHQ 내 대다수 인사들은 뉴딜주의자로, 진보주의와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이들과 대립한 일반참모 2부는 성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정보 및 첩보 활동을 총지휘하는 이들 조직은 직업군인이 대다수였고 반공정책을 추진하며 요시다 내각을 지지했죠. 양측 사이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참모2부는 민정국, 경제과학국을 '일본을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넘긴 일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틀어진 사이, 사건이 발생합니다. 참모2부가 민정국 차관의 신변을 감시하던 도중 앞서 설명한 쇼와 덴코 사건의 전모를 알아낸 거죠. 그로 인해 GHQ는 이 사건을 경시청이 내사하도록 지시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세 부서의 입장은 사뭇 달랐습니다. 경제과학국은 경찰에 수사압력을 행사해 사건을 뭉게려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민정국은 철저한 수사로 누명을 벗길 희망했죠. 참모2부는 당연히 공산주의자를 축출한 기회로 여겼고요.


하지만 경찰 수사 도중 민정국 접대 의혹이 포착되고 경찰의 수사 정보가 누설된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자, 민정국은 수사를 검찰로 넘깁니다. 수사를 통해 민정국 차관은 결백을 증명해 당초 목적을 달성하죠. 하지만 이후 여성 스캔들로 실각해 49년 5월 본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음모론의 실체야 알 수 없지만, 사건의 여파로 1948년 10월 민주자유당의 2차 요시다내각이 수립되면서 일본엔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요시다내각은 이후 6년간 미군정과 미국 본국 지지를 받아 장기 집권을 하게 되죠.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본 건 미군정 참모2부와 일 보수정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쇼와덴코 사건 5개월 후 일본 검찰 내부에 특수부가 설치되죠. 본래 검찰은 미국의 FBI같은 독자 수사기관을 갖고 싶어했지만, 미군정 민정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를 분산, 해체하길 희망했습니다. 여기에 각 지자체로 분할한 경찰이 1차 수사권을 독립 보유하는 것을 희망한다고 끈질기게 GHQ 상층부에 공작을 넣은 게 통해서 경찰이 1차 수사권을, 검찰은 공판 유지 한도 내에서 보충적 수사권만을 갖는 거스로 정리했죠. 그런 민정국이 검찰 특수부 출범을 용인한 건, 위 사건을 통해 검찰의 수사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결과는 검찰이 보수정권 탄생에 이바지한 것으로도 비춰져, 이후 일 검찰이 보수정권 부패에 철저히 추궁하지 못하는 태생적 약점을 지우기도 했습니다.


부수적으로 아시다 총리의 무죄 판결을 계기로, 1958년 일본은 형법 일부를 개정해 알선수뢰죄를 신설합니다. 재판부 역시 이후 록히드 사건 때는 대가관계를 폭넓게 인정해 내각 총리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도 하죠.


패전국 일본이 세계 대전이란 야만의 시기를 거쳐 위와 같은 음모론의 시대를 거치게 된 까닭엔 미군정과 맥아더의 권위적이고 제왕적인 통치 방식 또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GHQ막부 등으로 불릴 정도로 정부 위의 정부로 군림했고, '명령과 같은 강제력을 지닌 비명령'을 구사했다고 평가받아 오늘날 일본과 한국 정부에서 종종 남용되는 행정지도의 원형을 제공했다고도 하죠. 100만 이상 주둔한 미군을 포함해 점령군 전체가 특권신분처럼 취급받았고 언론은 통제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존 일본 관료 조직은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고 연합국사령부의 비호를 받아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권한, 영향을 행사했죠.


하지만 산업기술 측면에서 미군정의 이런 강력한 리더십은 일본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군수 산업을 재건하려는 맥아더와 미국 정부의 구상 덕분에 일본 산업계는 이전까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빠르게 성장 궤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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