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리뷰 / 죽음의 값을 흥정하는 세상에서의 '시'


제목 : 시(Poetry, 2010)

감독 : 이창동

출연 :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국가 : 한국

러닝타임 : 139분


죽은 고기를 저울에 달아 값을 매기듯이 죽은 아이의 시쳇값으로 자식들의 죗값을 대신하려 하는, 죽음마저 흥정의 대상이 된 비정한 세상에서 '시' 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은 고깃덩이처럼 비리고 끈적한 세상에서 '시' 가 죽어 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시는 죽어도 싸."


그럼 죽어가는 시를 좇는 미자는 어떤가요? 그녀 역시 시처럼 죽어가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 미자는 점점 '단어'를 잃고 있죠. 의사의 설명에 따르자면 알츠하이머는 '명사'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은 동사의 순으로 단어를 도둑질해 갈 거라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명사는 대상을 명명하는 품사입니다.


영화 <시>에 등장하는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앞날" 을 위해, 자식들의 죄를 덮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입니다. 저희들끼리 회동을 갖고 말을 맞추며 피해자를 구슬리기도 하죠. 그러나 열심히 '움직인다'라고 해서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행위'는 있지만 '존재'는 없습니다. '동사'는 있지만 '명사'는 없는 거죠.


이 영화에서 명사를 찾는 사람, 이름을, 이름의 자격을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는 사람은 오로지 미자뿐입니다. 그녀가 시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 잃어가는 단어들을 필사적으로 적어가며 오랫동안 매달리는 것처럼요.


그리고 실제로도 개인적인 경험상 시를 쓸 때 수정을 가장 많이 하는 부분은 동사이지만 가장 사려 깊게 골라 쓰는 부분은 다름 아닌 명사입니다. 아무리 비슷한 의미를 갖는 단어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전체적인 느낌이 영 딴판이 돼 버리거든요.


그럼 도대체 미자는 왜 꼭 시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단어를 도둑맞아 가는 와중에 말이죠. 저는 미자가 완성시키려고 하는 '시'는 죽어가는 세상에 대한 '비문' 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시'는 명사를 잃어가는, 죽어가는 세상에 대해 역시 명사를 잃어가는 미자가 미리 쓴 비문입니다.


시가 죽어가는 세상에 대해 미리 적는 비문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럼 죽어가는 세상의 비문을 미리 적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글쎄요 너무 어렵네요.


다만 역시 시를 쓰는 입장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 비문을 읽고서 느낀 바가 있는 저 같은 바보들이 비문을 이어 써 내려가고 또 다른 바보들이 다시 이어서 써 내려가고, 그렇게 다만 죽어가는 시와 세상의 수명이 연장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비문을 다 적기 전까지, 적어도 비문이 쓰이고 있는 한은 세상과 시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진짜로 죽지는 말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는 시, '아네스의 노래'는 저게 또 잠 못 들고 형편없는 비문 한 줄 쓰게끔 할 것 같은 시였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 한수를 끝으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대한 관람 후기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 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본문 - https://blog.naver.com/fox11142/222034883110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어벤져스 엔드게임 각본가 피셜 취소된 설정 8개
Mapache
13
4
0
뭘 보고 자라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해주는 CSI효과
IGOjinjja
10
1
1
고문으로 부은 17세 유관순 열사를 복원한 사진. 아... 한번도 유관순 열사를 17세 고등학생이라 실감해본적 없는데 웃는 얼굴을 보니 실감이 확되네요. 출처: 지구방위대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earthguard2020/ 고문으로 부은 17세 유관순 열사를 복원한 사진. 아... 한번도 유관순 열사를 17세 고등학생이라 실감해본적 없는데 웃는 얼굴을 보니 실감이 확되네요. 출처: 지구방위대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earthguard2020/ 감세바 V2 감동으로 세상 바꾸기 페이지 좋아요www.facebook.com/gamseba 좋아요 누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한것입니다!!!^^ MSG처럼 자극적인 짤에 지친 여러분!!! 이제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훈훈한 짤들을 만나보세요!!! tv고 라디오고 신문이고 대중매체에는 죄다 자극적인 소식들 뿐이라서 좀 따뜻하고 귀감이 되는 소식들 좀 퍼트려보려고 직접 만들었습니다. 출처 안밝히셔도 되니까 마음껏 퍼날라주세요. 요즘 세상 사람들 마음에 따뜻한 소식들 좀 심어주고 싶네요. 감동적이고 귀감이 될만한 소식을 제보해주세요. donelly@naver.com #인문 #교양
Roadst
32
3
12
코로나19가 강타한 韓박스오피스 "소는 누가 키우나?" 
Chicpucci
6
3
0
해괴망측한 엔딩,결백 (2020)
ggsndd1256
3
1
0
약혐) 진돗개에 물려 사망한 소형견
fromtoday
30
1
11
GIF
언제까지 가운데에만 앉을거니?
gaebriel
146
184
12
블라인드에서 난리난 디자이너분의 자살
fromtoday
18
0
0
아직 덥잖아?공포영화 추천!
ggsndd1256
18
13
3
영화리뷰에서 자주 쓰는 어려운 용어들!
ggsndd1256
14
6
1
다시 만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와 다케우치 유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어떤 미소와 그 결연함
cosmoskdj
7
2
1
저마다 생각하는 명장면이 다른 '히스 조커' 씬들
Mapache
33
11
4
GIF
명절 잔소리 유료로 합시다.
Roadst
7
1
1
리뷰할지 고민중인 영화들
ggsndd1256
6
1
2
[월간 빙글 9月] 빙구가 준비한 선물 받아 가세요!
VingleKorean
29
3
15
송나라와 명나라 최후 멸망 이야기
boogiewoogie
32
13
2
전쟁터에서 전사자의 휴대폰을 주웠을 때
CtrlZ
7
3
0
김영철이 촬영 중 눈물보인 이유
ehghl123
63
10
10
한국영화 최고의 등장씬은?
Mapache
40
11
6
GIF
수작과 평작,그 중간 지점.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
ggsndd1256
22
2
4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