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구세주들 (4) - 스승Guru

호머 사라손. 27세 나이에 미군정 산하 부서장을 맡은 엔지니어로, 일찌감치 일본 산업계의 품질 문제를 깨닫고 개선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본래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의대 대신 물리학과를 갔고 뒤이어 2차대전때 공수부대로 입대했습니다. 그 후 미국내 주요 레이더 연구소 중 한 곳에 들어갔죠. 그의 역할은 과학자들이 개발한 레이더의 프로토타입을 개량해 민간에서 양산 가능하게 재설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호머 사라손이 맡은 민간 통신 산업 부서는 100여 명이 채 안 되는 직원들이 소속되어 있었죠. 직원들 중 일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현지 산업 기반은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고 맥아더에 의해 해체되어 있었습니다. 사라손은 그야말로 맨땅에서 남은 생산 설비와 뿔뿔히 흩어진 일본인 엔지니어들을 다시 긁어모아 임시 변통으로 공장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공장 없이는 일본 전역의 라디오망 인프라 재건과 수신기 보급은 어림없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라디오 제작에 필요한 진공관 생산에 돌입했을 때, 사라손은 불량률이 턱없이 높단 사실을 깨달았죠. 생산한 진공관 중 90%가 불량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인 기술자들은 이를 별 문제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늘상 이 정도 불량이 나오는 게 당연했으니까요.


"일본인들은 품질에 대한 감각이 없다." 일본인과 처음 일해본 사라손의 솔직한 감상이 이러했습니다. 사라손은 공장 관리자에게 불량률을 낮출 방안을 요구했죠. 관리자들은 그 자리에서 그냥 침묵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이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죠. 사라손의 통역가는 그들이 어떤 답을 내놓아야 저 미국인이 기뻐할지를 논의중이라고 설명했죠. 상명하복식 문화에 길들여진 일본인들에게서 생산적인 회의를 기대하기란 요원해 보였습니다.


결국 사라손은 직접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인들 방식으로 그들을 통솔합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작업 방식을 개선하고 미흡한 점을 하나둘 고쳐나간 끝에 불량율은 90%에서 25%까지 감소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은 사라손이 말하는 품질이란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죠. 하루는 사라손이 작업장을 깔끔히 정돈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연했습니다. 이후 한 공장 관리자가 지시를 잘 이행하고 있단 걸 보여 주겠다며 새로 고용한 정리 정돈 담당자에게 그를 데려가죠. 조립 공정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먼지털이로 쌓인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남자를 보여주며 관리자는 뿌듯한 얼굴로 사라손이 감명받았으리라 여겼다고 합니다.


사라손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지금은 그가 얼마든지 일본인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죠. 하지만 나중에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과연 그때도 일본인들이 그에게서 배운 것들을 잘 실천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는 1949년 품질 검사소를 설립하고, 맥아더에게 건의해 미국식 경영을 일본인들에게 교육하자고 설득했습니다. 미국의 노하우를 한때 적국인 일본에 전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죠. 하지만 사라손은 일본이 만약 자립하지 못한다면 나중엔 미국이 혈세로 그들을 돌봐야 할 거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허락이 떨어졌죠.


사라손은 웨스턴 일렉트릭 사 엔지니어 찰스 프로츠만과 함께 민간 통신 분과 경영자 세미나 과정을 설계하고 일본인들에게 미국식 선진 생산 기술과 경영 이념 등을 전수합니다. 둘은 1950년 말 귀국할 때까지 이 교육 과정을 운영했고, 이후엔 일본 경영 협회에 운영을 이관하죠. 처음에 두 사람은 후임자로 월터 슈하르트라는 남자를 지목합니다. 하지만 슈하르트는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일본에 오지 못했습니다. 슈하르트 대신 후임자로 선택된 건 일전에 슈하르트와 일한 바 있고, 과거 사라손처럼 미군정을 통해 일본을 방문한 적도 있는 학자였죠. 1950년 일본 과학자 및 엔지니어 협회는 이 학자, 에드워드 데밍을 초대해 강연을 맡깁니다.


벨 연구소의 월터 슈하르트. 품질관리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통계적 품질 관리에 기반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작업도를 창안한 인물이지만 정작 벨 연구소에서는 그의 연구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와 자주 토론하며 품질 관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에드워드 데밍 역시 미국에선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산업계가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1947년 인도에 건너가 인도 사람들이 수학과 통계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네요.


에드워드 데밍은 본래 수학 및 물리학을 전공한 물리학자였습니다. 미 농무국에서 일할 당시, 그는 우연히 월터 슈하르트를 만나 큰 자극을 받습니다. 이후 그는 통계적 품질관리와 산업공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죠. 1940년 미 인구 조사국에서 인구 센서스 조사에 합류한 경험 덕분인지, 1947년 그는 맥아더 미군정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51년에 있을 일본 인구 센서스 조사를 지원합니다. 이때 데밍은 미국 내에서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죠. 하지만 일본에 오면서 그의 운명은 360도 뒤바뀝니다.


1950년 그는 일본 기업가들 앞에서, 또 TV와 라디오 앞에서 품질 관리에 대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때 그는 일본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합니다.


현재 일본 상품의 이미지는 선진국 제품의 복제본에 불과하지만, 5년이면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
내 말대로만 하면 일본은 수 년 안에 세계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


호머 사라손이 일본인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귀국한 바로 그 해입니다. 당시 일본 상품은 조잡하기 그지 없는 전형적인 후진국의 생산품일 뿐이었죠. 하지만 데밍은 수 년 안에 그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연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요?


당시 일반적인 인식에서 품질은 비용이었습니다. 즉 제품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투입되어야 했고, 그러면 비용은 자연히 제품의 비용에 전가되기 마련이었죠. 따라서 품질을 개선하자면 제품은 비싸져야 했습니다.


데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그는 고품질 제품을 생산해 고객을 만족시킨다면 그것이 곧 수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그는 품질 관리에서 일선 기술자들의 역할만큼이나 경영자의 역할 또한 강조했죠.


당신 회사의 기술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그들이 개선을 이뤄낼 수 있으려면 기업의 리더인 당신이 나서서 제품의 품질과 균일성을 개선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즉 개선의 첫걸음은 경영진의 몫입니다. 우선은 리더인 당신이 제품의 품질과 균일성의 향상을 열망하고 있고, 품질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회사의 기술자들과 공장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냥 말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의 열정어린 호소가 일본인들에게 감동을 준 건지, 데밍의 강연은 마지막까지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그를 초대한 협회에서는 데밍에게 감사를 표하며 강연료를 지급하려 했죠. 하지만 데밍은 강연료를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전후 일본의 상황이 아직도 열악하단 걸 그도 잘 알았거든요.


감동한 일본인들은 그가 수령하지 않은 강연료를 기금삼아 데밍의 이름을 붙인 품질 관리 상을 제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의 데밍 상입니다. 데밍과 데밍 상, 그리고 그의 일본인 제자들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이어서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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