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 (1) - 1878, 부산

1870년대 말 조선은 안팎에서 여러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1875년 윤요호 사건으로 이듬해 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은 후, 고종과 외척 세력인 민씨 일파는 개화 추진 의지를 보였죠. 하지만 아직 1873년 실각한 대원군의 세력이 건재했고, 정부 내외에서 개화 반대파, 이른바 척사 세력들이 미치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론 메이지유신을 통해 먼저 개화 정책에 성과를 본 일본이 1874년 대만출병, 1879년 류큐 병합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 청국 중심 국제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죠. 다만 일본은 최종적으로 양국이 충돌할 그 순간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완전하게 승리를 거두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청과 일본이 정면 충돌하는 건 약 20여년 후인 1890년대 일이죠.


대만출병시의 일본군인. 일본은 당시 청과 일본 양국에 애매하게 속해 있던 류큐국에서 표류해 조난당한 류큐인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빌미로 대만에 파병을 결정합니다. 처음에 출병 계획은, 열강국들이 외교 압력을 행사해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죠. 하지만 지휘관 육군중장 사이고 츠쿠미치는 이미 준비를 마쳤단 이유로 파병 철회 명령을 받지 않고 출병을 강행했습니다. 후에 일본은 파병이 정당한 조치였음을 청에게 인정하고 청측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끌어내는데 성공하는데요. 이는 사실상 일본이 류큐를 속방에 놓고 대변한 것과 다름없는 구도가 되어 1879년 일본이 류큐 병합이 성사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류큐 병합을 계기로 청국은 일본을 경계하며 이후 조선에 적극적 개입을 하게 되죠.


국제 정세가 뒤숭숭한 와중인 1878년 6월, 부산 옛 왜관 자리에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에 삼성암 승려로 자칭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그는 포교사로 파견된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과 하루 종일 교의에 대해 물은 후, 부처에 참배하고 돌아가죠. 이 인물은 9월 15일 통도사 백련암 서명, 실명은 기인이라고 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12월 9일 다시 별원을 방문한 그는 수 시간 후 돌아갔지만, 10일과 11일 다시 이틀에 걸쳐 종교 교리 이야기를 나누고 엔신의 소개를 받아 군함 히에이를 견학하기까지 합니다. 엔신은 자신의 포교 일지에 이렇게 기록하죠. '12/10 동인(기인)에게 염주와 경전 한부를 본산에서 주었다(...)' 이동인이란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는 건 이때부터입니다.


이동인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해군 군함 히에이. 1878년 2월에 취역한 콘고급 코르벳함입니다. 일본은 이 전함을 3500톤급 미만 함선인 삼급함으로 분류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에도 참전시켰죠. 측량선 등으로 1908년까지 쓰다가 1912년 매각되어 나중에 해체됩니다.함선명은 그 이후 1914년 취역해 1, 2차 대전에 참전하는3만 6천톤급 순양전함 히에이가 물려받게 됩니다.


이동인이 방문한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은 사실 일본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이었습니다. 히가시혼간지는 막부 후원을 받아 급성장한 곳으로, 개항 이후 일본이 막부파와 천황파로 나뉘어 사실상 내전에 돌입하자, 막부에 군사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승군을 조직해 참전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이건 잘못된 결정이었는데요.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정권을 천황에게 전격 돌려주는 대정봉환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이후 막부파 잔존세력이 1860년대 말 무진전쟁으로 완전히 소탕되면서 히가시혼간지는 정치적 입지가 악화됩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는 고대 천황제에 입각해 제정일치와 충효일본을 국시로 내세우고 신토를 국가종교로 채택하는 일련의 정책을 채택하죠. 그 결과 민간에서조차 불교의 영향력은 악화하여 불교 사원들의 폐쇄 혹은 합사, 신사 내 불교유물 파괴 등 폐불훼석 현상이 일어납니다. 일본 불교는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 이후 정부 시책에 적극 동조하게 되죠.


도쿄 히가시혼간지. 혼간지는 한때 켄뇨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해 무장 투쟁에 나설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결국 노부나가에 항복합니다. 켄뇨 사후 두 아들을 중심으로 노부나가에 대한 강경파와 화평파가 대립하면서 교단이 둘로 쪼개지죠. 이때 히가시혼간지는 도쿠가와와 손을 잡고 그 후원을 받는 반면, 니시혼간지는 교토에서 천황과 정부 관료들의 후원을 받았다고 하네요.


강화도 조약 후인 1877년, 일본 정부 내무경 오쿠보와 외무경 데라지마가 히가시혼간지 법주 곤뇨에게 조선 포교를 의뢰합니다. 여기에 응해 같은 해 9월, 오쿠무라 엔신이 부산에 파견되죠. 그는 파견 이후에도 조선에 주재한 하나부사 일본 공사, 마에다 겐키치 부산관리관 등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후 원산항과 인천항 개항에 맞춰 각 개항지에 부산별원의 지원을 설립하고 포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절에 호기심으로, 혹은 배움을 구하고자 찾아오는 조선 승려와 양민들에게 <진종교지>라는 책을 선사했는데요. 이 <진종교지>란 진종의 수행법인 진체와 세속의 왕법에 순응하는 속체가 하나를 이룰 때 완전한 교의가 성립한다는 진속이체론을 순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신라 때의 호국불교사상과 비슷하려나요?


히가시혼간지 광주본원. 현 부산 대각사로, 도심 한복판에 경내가 있는 절입니다. 지금도 일본범종 등 창건 당시 흔적이 있는 듯합니다. 이 절을 창건한 오쿠무라 엔신의 선조가 오쿠무라 죠신인데, 그는 1585년 조선에 건너와 고덕사를 세우고 일본 정토진종을 포교하려 시도합니다. 이게 정토진종에서는 첫 해외 포교 기록이라네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죠신은 전사자를 위령하겠다며 종군합니다. 한편 엔신은 히가시혼간지 10대 주지로부터 5.5cm짜리 황금불과 아미타여래 외 24개 품목을 받고 조선포교를 명받아 1877년 히라노 케이스이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오죠. 여기서 엔신은 포교사 육성을 위한 어학사, 부인회 조직, 채소 키우는 법 교육 등 활발하게 사회 활동과 포교 활동을 겸합니다.


어쨌든 히가시혼간지 부산 별원의 엔신과 꾸준히 교류를 주고받던 이동인은, 1879년 8월 중순 급한 일로 본산에 갔다가 돌아온 엔신에게 일본에 가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당시 조선은 허락없이 백성들이 외국에 나가는 것을 금지해서 이동인이 일본에 가려면 밀항하는 수밖에 없었죠. 엔신은 그가 일본에 가는 것을 돕기로 하고 그 내역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인은 원래 승려인데, 항상 나라와 호법을 걱정해왔다. 최근 조선국의 국운과 쇠퇴하고 종교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때, 혁명당 박영효, 김옥균 등이 국가의 쇠퇴한 운명에 분개하여 크게 쇄신하려고 하였다. 또한 동인도 뜻을 같이하였으므로 박영효, 김옥균이 동인을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열국의 공법 등을 알기 위해 우리 종문에 들어 일본에 건너가려고 하였다. 동인은 박영효로부터 받은 순금봉 4개(길이 2촌여, 둘레 1촌여)를 나에게 보여주며 이것으로 여비로 써 달라며 건네주었다. 이에 와다씨 및 총영사관 마에다 겐키치씨와 상의하여 본산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것은 한국개혁당 일본에 건너가는 처음시도라. 동인이 일본에 도착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박영효, 김옥균은 개화파 가운데서도 급진적인 개화를 기도한 인물들이고, 나중에 갑신정변의 주역들로도 알려져 있죠. 또 엔신은 이들을 '혁명당', '한국개혁당'이라고 칭해 이들이 이미 일정한 세력을 갖춘 조직처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동인은 소위 혁명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일본 불교뿐 아니라 열국 공법, 즉 국제법 등을 알고자 했죠. 또 이동인의 일본 밀항을 돕기 위해 히가시혼간지뿐아니라 일본 총영사관 측으로부터도 협조를 얻습니다.


이동인은 어떻게 박영효나 김옥균 등과 알게 됐을까요? <김옥균전>에는 이동인을 북한산 기슭 산사 암주라고 하면서, 하나부사 영사의 통역을 맡은 가에데 겐데쓰를 통해 일본 불교를 접하고 일본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한편 개화파의 스승인 백의정승 유대치는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이동인이 유대치에게 불경을 가르치려고 그의 문하를 드나들다가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은 이동인의 식견과 품성, 일본인들과의 교우 관계 등을 높이 사서 그를 일본에 보냈다고 합니다. 또 일본 개화파의 거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시사신보>에선 김옥균이 애초에 일본에 갈 뜻이 있었는데, 국법 때문에 함부로 건너가지 못하고 대신 일본에 갈 사람을 구하다가 이동인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극진히 대접해 친해졌다고 썼죠.


이동인의 이름은 서재필 회고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동인은 부산서 입수한 <만국사기>나 세계 각국 도시, 군대 규모를 찍은 사진, 만화경 따위를 김옥균 등에 보여주고 환심을 샀다고 하네요. 당시 그런 서학 서적들은 불온서적 취급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만 발각되어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개화파 인사들은 한곳에 머물며 책을 읽지 못하고 이절 저절 옮겨다니며 이동인이 보유한 책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최초로 성냥을 소개한 게 언제인지 아시나요? 1879년에서 1800년 사이 이동인이 이들 개화파에게 성냥을 선보인 게 아마도 최초일 거라고 합니다. 이동인은 이러한 서양 문물을 모두 부산을 드나들면서 구했던 모양입니다. 김옥균은 이동인에게 이러한 것을 더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하죠. 어쩌면 서양 문물을 구하는 것 역시 이동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목적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유대치, 본명 유홍기는 역관 집안 출신의 한의사로, 역관인 친구 오경석이 중국에서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을 가져오자 이 책들을 읽고 개화사상에 눈뜬 인물입니다. 이후 1860년대 셔먼호 사건이나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침 사건들을 보고 당시 서구 열강들의 동양 침탈로 초래한 위기가 조선에도 닥쳤다고 보죠. 1869년 박규수가 한성판윤에 전임되어 상경하자, 유대치는 박규수에게 개화파를 형성해 혁신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제안해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 결과 1870년대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 다수 양반자제들이 개화사상을 교육받죠. 특히 김옥균은 유대치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불교 신앙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유망한 개화파 청년들이 모두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자, 세간에서 그를 백의정승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개항 후 유대치 역시 정부 개화정책 추진을 돕기 위해 1882년 설치한 감생청의 종9품 부사용에 임명되는데요. 이후 정9품 사용직까지 오르지만 수구파의 반발로 감생청이 1년만에 폐지되면서 그 역시 공식 직함을 맡을 수 없게 됩니다. 이후 임오군란, 청의 내정 간섭, 갑신정변 등을 두루 겪다가 갑신정변 진압 후 행방이 묘연하게 되죠.(위 사진은 1884년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이 함께 찍은 것입니다.)


이동인은 일본 옷을 입고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부산에 출장나온 승려 와다 엔쥬의 도움을 얻어 교토로 도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후 교토에 약 10개월간 체류하며 일본어를 익히죠. 1879년 8월 28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오사카일보를 인용해 이 도항 경위를 설명합니다. 여기 따르면, 이동인이 혼간지 본산에 교파 가입 청원을 했고, 혼간지 본산은 외국인을 함부로 받아들이는게 좋지 않다 여겨 거부했지만 그가 간절하게 재요청하자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8월 4일 이동인의 거류 사실을 관계 당국에 신고했다고 했죠.


1880년에 이동인은 득도식을 통해 정식으로 정토진종 승려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도쿄로 건너와 아사쿠사 별원에 머물며 어학을 습득하죠. 그는 도쿄에서 학문뿐 아니라, 여러 인물과 교류를 갖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조선인 최초로 일본 개화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것도 바로 이동인이라고 하죠. 또 4월 25일에는 일본 외무성에서 하나부사 공사와 회담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부사는 이 자리에서 이동인에게 들은 내용을 <동인문서>라고 하는 기록으로 남기는데요. 여기서 다룬 내용들이 또 의미심장합니다.


개화당 중심은 홍문관 교리 김옥균으로 29세에 불과하지만 고위 참판의 가문 출신으로 재덕을 갖춰 사람들을 잘 이끈다. 역관 오경석과 함께 유홍기(유대치)에게 가르침받았다. 금릉위 박영효는 20세로 일품관이며 재능이 있고 뜻을 품은 사람이다. 강위는 유대치와 함께 개화당이 선배로 우러러보는 인물이다.
조선정권은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세도를 할 사람이 없다. 국왕, 명성왕후, 영의정 이최응, 왕비의 오빠 민태호 4인의 합의가 겨우 세도를 하는 정도이다.
서양인은 타인이나, 일본인은 형제다.(...)나는 위급할 때 의지할 수 없는 타인에게 이익을 얻게 하기보단, 형제 사이인 일본인과 항상 이익을 나누고 싶다.
개혁의 모범을 얻기 위해 동지 중 십수인을 동반해 가서 육해군이며 외무며 회계며 권업 등의 사업과 제도의 대체를 모두 조사토록 해야 한다.


이동인은 이처럼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일본 영사인 하나부사에게 줄줄 털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일본인과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유대감을 강조하는 한편, 후일 실현되는 신사유람단 같은 구상을 거리낌없이 내놓기도 하죠. 하나부사 역시 평소 조선인들을 일본에 보내 유학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만난 건 외무성 관료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5월 12일, 주일영국공사관 서기관 어네스트 사토우를 찾아간 그는, 아사노라는 일본식 가명을 쓰면서 자신이 동포를 계몽하러 일본에 왔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사토우에게 동포들에게 보여줄 유럽 건물, 기계 사진, 무엇이든 충격을 줄 만한 물건을 요청합니다. 또 매일같이 찾아와 사토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기까지 했다네요. 사토는 그런 그를 자기 일기에 '나의 조선 친구'라고 칭했고, 영국 공사관도 이동인을 신임해 비밀 요원 자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네스트 사토. 일본 개항 직후 일본의 혼란상과 메이지 유신, 중국 의화단 운동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모두 지켜본 영국인입니다. 일본어를 배워 통역관 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1880년 8월, 이동인은 또 한번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조선 정부에서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이 도쿄로 와서 일본 정부가 숙소로 마련한 아사쿠사 별원에 머물게 된 거죠. 먼저 얘기했다시피 이 절에는 이미 이동인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곧 그는 일본 땅에서 조선에서 온 수신사 김홍집과 마주앉게 됩니다.


과연 이것은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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