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인, 조선의 라스푸틴(2) - 도쿄, 1880

오경석.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신적 배경을 제공해 준 사람으로, 중인인 역관이었습니다. 그는 1874년 동료 한 명만 대동하고 개인 자격으로 북경주재 영국공사관을 찾아 서기관 메이어스와 대화했습니다. 그 만남을 메이어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 그는 머지않아 유럽열강이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정부로 하여금 그 은둔 체제를 포기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기묘한 희망을 표명했습니다. (...) 자신은 일본이나 유럽의 침공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렇다면 대대로 조선의 적국인 일본보다는, 차라리 조선을 보다 인도적으로 다룰 것으로 생각되는 유럽에 의해 실현되는 편이 낫다(...)
이는 이동인이 영국 공사관 사토우를 찾아가 한 말과 유사합니다 ; 그는 조선이 몇 년 내로 외국과의 관계를 맺을 것이지만, 그 전에 반드시 현재 정부를 일소할 (sweep away) 필요가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처럼 생각하는 청년들의 수는 날마다 늘고 있다.


이동인이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김홍집을 만나기 위해 주변 상황을 전부 짜맞춰 놓았다는 얘기죠.


우선 도쿄로 온 이동인이 일본 외무성에 출두해 하나부사 공사 등 주요 인물과 면담한 일이 있습니다. 이미 1880년 2월 오쿠무라 엔신이 잠시 하나부사 공사와 마에다 부산주재 관리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동인이 도항했단 사실을 듣고 뒷일을 부탁한 일이 있었죠. 또 수신사 김홍집은 단순히 근대 문물을 둘러보는 것뿐아니라, 양국 사이 세관 설치 문제, 새 무역장정 체결 문제를 놓고 교섭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 협상을 위해 미리 알아둘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알아두고 싶었겠죠. 하지만 이동인의 역할은 단순한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동인이 김홍집과의 만남에 대해 오쿠무라 승려에게 알려준 바는 이랬습니다.


귀승의 배려로 일본 혼간지에 체제하면서 교법과 국정, 어학 등을 대략 배웠고, 그 뒤로 도쿄 혼간지에 가서 스즈키 소장의 주선으로 유명한 조야의 인사들을 만나서 한국의 현재 국운을 말하니 모두 한국을 도우려는 후의를 보였소. 마침 그 때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에 들어와서 아사쿠사 혼간지에 머물렀소. 스즈키 교정의 접대는 김 수신사와 이조연을 감동시켰소. 하나부사 공사는 김 씨에게 인천개항 건을 말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부사 공사의 뜻에 응하지 않았소. (...) 그래서 나는 스즈키 씨에게, '내가 일본인이 되어 김 수신사를 만나 일본정부의 후정부터 재야 유지자의 참뜻을 전한다면 김 수신사도 안심해서 하나부사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하였소. (...) 하나부사는, '동인은 밀행한 자이다. 수신사를 만나면 저 나라의 폭정에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계책이다.'라고 했소. (...) 나는 '내가 일본에 와서 국은에 보답하고 불은을 갚기로 결심했으니, 나라를 위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 근심하지 않소. 김 수신사를 알현하고 싶소.' 라고 했소. 하나부사와 스즈키는 감탄했고, 결국 김 수신사를 만났소.


이어서 이동인은 자신이 일본 옷차림을 하고 김홍집에게 조선어로 말을 걸자, 김홍집이 관심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 뒤 자신이 일본 조야 인사들을 만나보니 모두 조선을 도우려고 할 뿐이라면서 하나부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고 하죠. 여기에 김홍집이 '아하! 여기 기남아가 있어 국은에 보답하는구나!'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동인 자신은 김홍집과 하나부사 양쪽에 신임을 얻었다고 했죠.


영국 측 어네스트 사토우 말은 다릅니다. 7월 1일 사토우는 고베 주재 영국영사에게 이동인이 수신사 입국으로 인해 조선 귀국을 미룬 것처럼 편지를 보냅니다. 또 8월 11일에는 이동인이 오늘 아침에 도착한 조선 수신사와 면담할 수 있을지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쓰죠. 그에 따르자면, 이동인은 수신사가 일본에 들어오기 한 달여 전부터 기다리면서 접촉 기회만을 엿봤던 셈입니다. 적어도 김홍집이 운좋게 '때맞춰' 이동인이 머무는 절에 오진 않았을테죠.


1881년 출간된 일본 <조야신문>에서는 이동인이 수신사와 만난 이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처음에 이동인은 양복 차림으로 일본상인이라고 하면서 수신사의 수행원에게 접근했다고 합니다. 시계 얘기로 관심을 끌다가 이내 개항의 필요성 얘기를 하며 설득한 모양인데요, 이 과정에서 이동인이 실수로 조선말을 두세 마디 사용해버렸다고 합니다. 정체가 발각되자, 이동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정체를 밝히고 수신사를 면회했다죠. 신문은 전적으로 이동인 덕분에 수신사가 갑자기 개항론으로 선회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신문 편집장이 1880년 이동인을 직접 만났다니,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동인은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김홍집을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김홍집은 그가 발이 넓고 근대 문물과 국제 정세에 식견이 있단 걸 알게 되죠. 조선으로 돌아가는 날, 김홍집은 이동인을 데리고 귀국합니다.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이 선사한 황쭌센의 <조선책략>도 함께 가지고 말이죠.


<사의조선책략>, 흔히 조선책략이라고 부르는 책입니다. 김홍집은 일본과의 관세 협정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협상을 할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죠. 그래서 그는 수신사로 파견된 일본의 청국 공사관을 여러 차례 방문해 공사 하여장과 회견을 하고 조언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하여장은 관세와 미곡수출금지조치를 정하는 등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러시아의 남하 위협을 경고했다네요. 아울러 조선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세력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설명하고 미국과 수교할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취지로 황준센이 쓴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건네줬죠. 김홍집은 조선으로 돌아가 이 책을 고종에게 진상하고 신하들이 돌려보았다고 합니다. <조선책략>에 대한 관심은 조정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컸기에, 결국 영남 선비 이만손 등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려 개항 정책과 <조선책략>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이동인을 당대 젊은 세도가인 민영익에게 소개했습니다. 민영익 또한 이동인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여겨 자기 사랑방에서 머물도록 허락했죠. 민영익은 명성왕후의 조카로 명성왕후의 보호자역을 맡던 민승호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죽은 민승호의 아들로 입양되어 젊은 나이에 별기군 운영을 장악하는 등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런 인연에선지 이동인은 고종까지도 종종 알현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에도 이동인을 보는 눈은 곱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선에서 탄압하던 불교 승려 출신에 정체도 불분명한 데가 많았죠. 승려라고 해도 그의 출신지가 어딘지는 현재에도 불분명합니다. 혹자는 동래 범어사, 혹은 양산 통도사라고도 하고, 서울 봉원사 출신이라는 설도 있죠. <나암수록>이라는 역사서엔 이동인을 아예 '서양술 하는 왜승'이라고 하면서, 혹자 말로는 조선 사람이 어버이를 버리고 삭발해 해인사에 있다가 서양 국가에 들어가 기술을 배웠다고 씁니다. 또 윤치호는 청년재상 민영익 사랑에 이모라는 중이 산다면서, 그가 일본어를 잘해서 김홍집을 따라 귀국했고, 일본 사정을 잘 알고 일본 개화 이야기를 재밌게 잘 해서 민영익뿐 아니라 고종도 여러번 불러 보았다고 하죠. 심지어 이동인의 발의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는 말까지 합니다. 사실인지는 확실지 않지만 적어도 그런 소문은 있었던 게 분명하죠.


귀국할 당시 이동인은 개화당에서 쥐어준 금막대기를 팔고, 또 혼간지에서 천 엔을 빌려서 가스 램프나 석유, 여러 신기한 물건을 대량구입해 가져왔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여러 사람들에게 선사했다고 합니다. 이동인은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 눈에 띄게 됩니다.


출신, 정체 모두 불확실한 승려가 불현듯 나타나 뛰어난 식견과 재주를 선보이고, 이를 통해 정부 고관과 나아가 국왕의 신임까지 얻게 된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에 나타난 괴승 라스푸틴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어쩌면 이동인 역시 라스푸틴이나 신돈처럼 고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온갖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 차르처럼 권력이 강하지도 못했고, 국내외에서 여러 세력에게 도전받고 있었죠. 어쩌면 그 차이 때문에 이동인이 라스푸틴처럼 되지 못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1880년 10월, 고종은 정부대신들을 모아놓고 조선책략의 내용과 대미수교 건에 대해 논의합니다. 하지만 다른 정부 고관들은 모두 꺼리는 눈치고, 오직 영의정 이최응만이 적극 찬성하죠. 고종은 영의정 이최응 및 정부 고관 6인을 따로 좌의정 김병국 집에 모아 이 문제를 따로 논의하라고 지시합니다. 논의 결과 대신들은 만약 미국인 슈펠트가 다시 수교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오면 물리치지 않고 접수하자고 결론내립니다. 고종은 사실상 자신만의 강력한 의지로 관철한 이 결정을 재일본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보내기로 하죠.


로버트 윌슨 슈펠트. 그는 1880년 5월 일본의 중재를 통해 조선 개항을 추진하며 교섭했지만 동래부사 심동신이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후 이홍장이 조선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연미론을 추진하면서, 슈펠트를 초청해 양국간 수교 주선 약속을 해주죠. 슈펠트는 제임스 블레인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해 교섭전권을 부여받고 1881년 5월 딸 몰리와 함께 중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그 뒤 조선으로부터 전권을 넘겨받고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시하는 조항을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는 이홍장과 긴 줄다리기를 하게 되죠. 결과적으로 조미수호조약이 1882년 체결되면서 그가 바라던대로 큰 공적을 올리게 됩니다.


이 중대 임무를 맡게 된 게 바로 이동인이었습니다. 10월 15일즈음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23일에 서울에서 온 밀사를 통해 위 회의 내용을 전달받습니다. 이후 11월 2일 탁정식이 외국여행 정식 허가를 받고 원산에 오지요. 이후 둘은 군함 아마기를 얻어 타고 일본으로 출발합니다.


목조 슬루프함 아마기.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에 참전했고, 러일전쟁 때는 항구 경비함으로 쓰이다가 퇴역해 허드렛함, 연습함 등으로 쓰였습니다. 1880년 6월엔 울릉도 해역 측량을 수행하기도 했다네요.


1880년 11월, 오쿠무라는 교토 본산이 이동인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다른 기록에서 히가시혼간지에서 이동인에게 2만엔을 빌려 주었고, 이동인이 그 돈으로 직물, 도기 등 신기한 물건들을 구매해 서울로 보냈다고 하죠, 여기서 2만엔은 임오군란 후 조선 정부가 일본 공사관 신축 비용으로 지급한 금액과 같습니다. 혼간지, 나아가 일본 정부가 이동인과 개화파에 상당한 자금을 대었단 소리죠.


11월 15일 도쿄에 도착한 이동인과 탁정식은 곧바로 영국 공사관 사토우에게 갑니다. 이동인은 그에게 개화당이 현 내각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으니 영국이 군함 여러 척과 군대를 끌고 와 무력 시위를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또 17일엔 일본 측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를 방문해 비슷한 시위 행동을 요청하죠. 결과적으로 영국은 움직이지 않았고, 일본은 이동인이 요청한 바와 달리 하나부사 공사가 간략한 의장만 갖추고 호위병만 대동해 조선으로 가도록 합니다.


이동인은 그 뒤 11월 18일 도쿄에서 열린 흥아회 월례회에 참석합니다. 이 흥아회란 조선, 청, 일본이 연대해 구미 열강의 아시아 진출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였죠. 이 단체를 설립한 건 해군 군인 소네 도시토라였습니다. 이 흥아회에 참석한 조선인은 이동인 외에도 2차수신사로 왔던 강위, 이조연, 윤웅렬, 수신사 박영효, 고문 김옥균 등입니다. 조야신문 편집장 스에히로 시게야스는 흥아회에서 만난 이동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 나라(조선)의 정체와 풍속을 물으니 말을 명랑하게 하면서도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었고 조선의 폐정도 낱낱이 들면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동인의 성격에 대해선 나중에 동료인 탁정식조차 성품이 극히 경솔하고 조급해 일마다 위태로운데도 그 위태로움을 알지 못하고 남 말도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성격이 나중에 이동인의 발목을 잡게 되죠.


이동인이 본래 목적한 대로 청국 공사관을 방문한 건 도쿄 도착 4일만이었습니다. 공사 하여장은 나가사키를 통해 본국에 전보를 보내 이동인이 국왕의 비밀 조서를 가져왔고, 미국과 조약 중재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한 후, 청국 총리아문에서 대응을 지시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여장은 이동인이 행낭에 가져온 문서를 본 뒤, 그가 꺼려했음에도 강요하여 내용을 베끼고 본국에 첨부해 보냈지요. 하여장이 베낀 문서는 미국과 수교를 놓고 조선에서 이뤄진 회의 기록과 요약이었습니다. 하여장은 내용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해 적죠.


이후 영국 공사 케네디가 청 공사관에 찾아와,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원한다는 소문을 들었고, 영국 또한 조선과 수교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하여장은 이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하며, 여럿이 함께 가면 분명 이뤄지지 않는다고 만류해 케네디를 돌려 보내죠. 당시 조선은 서양 국가들에게 은둔의 왕국이었고, 각자 목적한 바는 달랐지만 정식 수교를 원하는 나라는 적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이들과 조선 사이를 중재해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 싶어했습니다. 이전에 류큐가 일본에 병합당한 것과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던 거죠.


사명을 마친 이동인은 12월 18일 원산에 도착한 후, 자신이 일본에서 사 보낸 물건들을 받으러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이때 유대치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동인을 만나죠. 그 자리에서 유대치는 이동인에게 국왕이 그를 밀파한 사실을 대원군이 알았고 이동인을 매국노로 규정해 체포하려 한다고 경고합니다. 경고 때문인지, 서울로 잠입한 후 이동인은 개화당과 다소 거리를 둔 채 민영익에게 밀착합니다. 귀국 후 조선과 미국이 수교할 것에 대비해 미리 조약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실제로 1882년 김윤식이 청나라 이홍장과 해당 조약 협상을 놓고 검토시 기준으로 쓰였습니다.


1880년 12월, 조선은 개화 정책 추진을 위해 청 제도를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12사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임명되죠. 이번에 그가 맡은 임무는 참획관 이원회를 보좌해 총포, 선박 등을 시찰하고 구매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신문물을 배워 오라고 일본에 보낼 신사유람단을 안내할 향도 역할도 있었죠. 고종이 비밀리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이 부산에 집결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이동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과연 이동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동인이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될 때, 함께 참모관에 임명된 사람이 바로 이제마입니다. 흔히 <동의수세보원>을 써서 사상의학을 제시한 한의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부터 군관에 뜻이 있어 무과에 합격하고 진해현감까지 올랐습니다. 이후 현감에서 물러나 서울로 돌아온 후 쓴 책이 <동의수세보원> 두 권이죠. 1896년 60세의 나이로 최문환의 난을 평정해 정3품 통정대부 선유위원에 제수되고 1897년 고원군수에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모든 관직에서 내려옵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함흥에서 한약국을 운영하며 <동의수세보원>을 개편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네요. 위 초상화는 이후 그의 후손들이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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