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우린 방주를 탈 수 있을까요?_권영한 (스타일 매거진 「하이컷」기자)

관객평은 극과 극이지만 영화 '노아'는 흥행 질주를 달리고 있다. 사진 : 영화 <노아>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050&Code1=004 ※아래 글 중 영화의 주요 내용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권영한 스타일매거진 '하이컷'기자】우린 방주를 탈 수 있을까요. 영화 <노아>를 보고 나오며 제일 먼저 든 생각입니다.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우린 종말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종말과 같은 대재앙이 지구를 강타할 때, 우리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요? 겨울왕국보다 순조로운 스타트 <노아>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노아>가 지난 20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했습니다. 첫 날 오프닝 스코어는 18만 명. 최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겨울왕국>(16만명)보다 빠른 스타트입니다. 주말 내내 박스오피스 1위에서 내려오질 않더니 개봉 첫 주에만 113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영화 <노아>는 성경에서 출발했고, 성경의 대전제를 크게 위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교리의 복원과 확산에 충실한 영화는 아닙니다. <쿼바디스>나 <벤허>,<십계>를 기대한 분들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이나 기독교 내부에서도 ‘영화는 영화일 뿐’ 혹은 ‘성경의 발칙한 오독’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엇갈립니다. 영화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을 제외한 땅 위의 모든 것을 먹고 태우고 파괴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들이 머문 곳은 생명이 살 수 없는 폐허, 불모의 땅으로 변합니다. 어딘가 낯이 익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마치 창세기 직후의 지구를 현대 산업 문명이 갉아먹고 있는 지금의 지구와 동일선상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노아는 창조주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만듭니다. 감독의 상상으로 빚어낸 바위 괴물들(네피림)이 방주 제작을 돕습니다. 인간 무리의 왕 두발 가인(레이 윈스턴)은 방주를 뺏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과 땅의 문이 열립니다. 위아래에서 동시에 물폭탄이 투척되는 거죠. 영화 속 인간들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여 불모의 땅을 만드는 장면이 산업혁명 이후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 영화 <노아>  노아에게 선택받을 수 있을까? <노아>는 인간 노아가 겪는 고뇌를 쫓아갑니다. 노아는 동족인 인간의 몰살 앞에서 그리고 인간인 가족의 생존 앞에서 갈등합니다. 방주 안에 있는 동안에도 한 동안 밖에선 사람들의 절규가 들려옵니다. 방주의 지붕 위에라도 그들이 올라탈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노아는 단호합니다. 오염된 인간의 피를 씻어내는 게 신의 뜻이니까요. 여기서 노아는 자기 자신과 가족 또한 인간임을 고민합니다. ‘살아남은 나와 가족 또한 창조주의 조화로운 낙원을 파괴할 또 다른 악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노아는 점점 미쳐 갑니다. 마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인 <블랙 스완>에서 흑조가 되기 위해 미쳐 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니나와 노아는 불안이라는 성난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잉태한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입니다. <노아>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인물은 절대악으로 그려지는 두발 가인입니다. 그는 물폭탄을 뿌리는 창조주를 향해 “왜 나에겐 말을 걸지 않나요. 우리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인데”라며 절규합니다. 마치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낳은 건 당신이야”라고 말하는 연쇄 살인범처럼요. 괴물은 나지만, 그걸 만든 건 어머니와 사회라는 거죠. 이쯤 되면 궁금해지긴 합니다. 신이 있다면 그리고 인간을 만든 게 신이라면, 흉악한 연쇄 살인마나 전쟁광 같은 피조물을 굳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든 이유가 뭘까 하는 거죠. 두발 가인의 욕망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로건 레먼)에게로 이어집니다. 함은 번식할 짝을 찾는 일이 방주를 만드는 것보다 더 시급한 철없는 사춘기 소년으로 그려지고 있는데요. 함은 친아버지인 노아 이상으로 두발 가인에게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선악과로 인도하는 뱀처럼, 두발 가인은 함을 욕망으로 인도하게 되죠. 참고로 두발 가인과 함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이긴 하지만, 이런 설정은 모두 성경엔 없는 감독의 상상입니다. 노아는 후세의 평화를 위하여 인간이 멸종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끝까지 고민한다. 사진 : 영화 <노아> 노아의 현대판 ‘테이크 쉘터’ 당시의 인간들이 보기엔 두발 가인이 정상이고 노아가 반미치광이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노아가 현재에 존재한다면 그 역시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에서 아로노브스키 감독의 <노아>는 제프 니콜스 감독의 <테이크 쉘터>를 떠오르게 합니다. <테이크 쉘터>의 주인공 커티스(마이클 섀넌)야말로 현대판 노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커티스는 세상이 파괴되는 예지몽을 꾼 이후부터 멀쩡한 집 앞마당에 땅을 파 방공호를 만듭니다. 커티스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직장 동료와 심지어 가족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사실 커티스를 불안하게 만든 건 종말의 예지몽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예지몽을 꾸게 된 무의식적 배경엔 금융위기로 촉발된 대량 실직의 공포, 자본주의 경쟁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간신히 붙잡은 중산층의 삶이 무너진다는 건,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사라지는 종말만큼 충격적인 일이겠죠.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나는 방주 안에 있는 인간인지 밖에서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이 될지 궁금하다. 사진 : 영화 <노아> 난 방주에 오를 수 있을까? <노아>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대홍수가 시작된 뒤 바위에 붙어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걸하던 한 뭉텅이의 사람들이 벼락같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겁니다. 찍 소리 못하고 사람 발에 밟혀 죽는 개미처럼, 인간은 종말의 파도 앞에서 무력합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우리 중 선택받은 소수만이 안전한 방주에 올라탈 수 있겠죠. 방주의 바깥에 있는 대부분의 우리는 눈 뜨고 종말을 기다려야 할까요. <노아>는 어떤 이에게 독특한 재난영화일 수도 있고, 어떤 이이겐 만들다 만 성경 오독 영화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저에겐 노아보다 “왜 나는 안 태워주냐”는 두발 가인의 게걸스러운 음성이 더 기억에 남는 영화였습니다. 두발 가인을 미화하거나 신성을 모독하려는 건 아니고요. 요즘 세상의 ‘진짜 신’인 자본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차고 넘치는 것 같아 하는 소리입니다. 진짜 방주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들일 텐데 말이죠. http://insight.co.kr/content.php?Idx=1050&Code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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