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걷는 독서 10.2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한다


- 박노해 ‘해거리’

Korea, 2008. 사진 박노해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사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해거리’

https://www.nanum.com/site/1297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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