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승부한다

날이 덥네요. 날이 더우면 아이스커피를 마셔야 돼요. 묻지마(요), 이의를 제기하지도 마(요). 마셔(요) 쫌. 주말을 대충 보내고 나니, 다 늦게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커피 볶는 사람이지만, 집엔 드리퍼 세트가 없어요. 매일 죽어라 마시는 거 집에서까지 마시고 싶진 않아요, 집에선. 좋은 드립세트 살 돈도 없어요. 마음에 드는 핸드드립 세트를 사려면 우리 생각보다 많이 들어요. 주전자만 해도 막 3-40만원. 걘 손에 짝짝 붙을 것만 같고.. 물이 채찍처럼 휘어질 것만 같고, 막 갖고 싶고. 드리퍼도 비싼 건 왠지 회오리 물살을 층으로 일으키며 내려갈 것 같고, 유리포트도 비싼 건 히터 없이 보온 겁나 오래될 것 같고. 바닥에 팽개쳐도 금도 안 갈 것 같고. 비싼 그라인더는 왠지 커피의 조직 세포를 건드리지 않고 갈아내줄 것만 같고.. 역시 커피는 맥심. 연아가 아무리 웃으며 꼬셔도 맥모골이 끝판왕. 그런데 불현듯 커피를 내려 마셔야겠다 생각이 드니, 이거 왠지 초조해져요. 드리퍼는 며칠 전에 친구 줬고, 호소구치(주둥이 좁은 주전자)는 사무실에 있고, 종이 필터는 있고, 원두도 있고. 즉, 집에 있는 건 원두와 종이필터 뿐. 그럼 난 어째야할까요. 그럼, 여기서 오늘의 놀이 session #2. 집에서, 나도 커피 내려 먹자 시간입니다. (session #1. -이 생각 안 나시는 분은 페이스북의 지난 번 session #1 편을 참고해주세요, 링크는 안 알랴주.려다가 친절하게 올려드림) https://www.facebook.com/wondoopanda/posts/427501987393244?stream_ref=10 아, 언제부터 커피 마셨다고.. 이젠 몸이 막 커피를 원해요, 그런데 커피 내릴 도구가 딱히 없어요, 난 지금 안 마시면 왠지 심야 커피숍에라도 가..가버릿! ..것 만 같아요. 일단 원두를 갈아봅니다. 일반적 가정에선 보통 핸드밀을 쓰겠지만 -뭐, 전동 그라인더를 사용하시는 분도 계실테지만요,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즐기시는 거라면 핸드밀을 쓰시는 분도 상당히 많으실 거에요, 사실 쓸만한 전동 그라인더는 쵸큼 비싸기도 해서..- 전 그런 거 없어요. ..사실 좀 전에 원두를 갈 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일단 원두만 먼저 갈았어요. 뭔가 나를 구원해줄 도구가 있을 거야. 그렇게 믿었어요. 대책도 없었어요, 그냥 일단 갈아놓고 도구를 찾아보자 했어요. 뭔가 무모하지만 사람이 닥치면 하는 타입이라,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 뭔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야. 뭐, 그랬어요. 전 그런 타입입니다. 일단 찬장을 막 뒤적 뒤적 합니다, 이 시간에 찬장을 뒤적거리면 분명 어머니께서 깨어나실 거에요. 그리곤 귀에 달지 않은 한 마디를 하실 테고, 전 왠지 우울해져서 이 나이에 가출이라도 하고 싶겠죠, 하지만 막상 가출해도 갈 곳이 없는 걸 전 진작 알고 있으니 그냥 견디는 스킬을 높이는 게 백번 나아요. 음, 이 시간에 바스락 바스락 하면 누구라도 욕 먹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아이러브 어머니. 최대한 조심스레 소리 안 나게 살금 살금 어기영차 도구를 물색합니다. 일단, 이 시점에서 이미 원두는 다 갈려버렸어요. 이젠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지금 도구 찾기를 포기하면 내일도 포기하는 습관이 생길 거에요. 포기가 생활화 될 거에요. 그렇게 만사 포기하는 습관을 들이게 될 거에요. 인생의 실패자가 될 거에요. 사실 그냥 맥모골을 먹을까도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갈아둔 원두를 버리는 건 아까워요. 간 원두를 맥모골에 넣어 먹어볼까도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카noo 커피를 보고 엄청 비웃었던(..관계자분께는 죄송합니다..) 전적이 있던지라, 차마 그런 짓은 못 하겠어요. 아니 왜 멀쩡한 커피에 원두가루를 넣어서 장난질이야. 열심히 찬장 뒤적 뒤적, 온 집안의 찬장이란 찬장은 다 뒤적 뒤적. 네, 집엔, 유선 주전자와, 믹서기(라고 하나요?), 차(茶)를 내리는 다관, 원두, 종이컵, 가장 중요한 커피 필터, 낑깡과 바나나(는 뭐니..)가 있군요. 와와, 신난다. 종이컵 밑을 일단 난도질해서 구멍을 냅니다, 필터를 그 안에 깔아요. 뜨거운 물을 붓고 필터를 헹굼과 동시에 종이컵 내부면에 안착시켜요. 오오, 여기까진 괜찮아, 친구한테 드리퍼를 줬던 걸 다시 가져올까 고민을 했었지만 드리퍼 따위 없어도 될 것 같아. 굿.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종이컵 밑둥으로 커피가 추출되어 나오죠. 그 종이컵을 올려둘만한 좁은 주둥이를 가진 '식기류'가 당최 안 보여요. 어머. 이걸 어째. 갑자기 신경이 쏠려옵니다. 종이컵을 든 채로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하나. 그거 사실 못 할 짓인데.. 어디 캠핑을 가서도 그딴 짓은 안 하겠군.. 뭐 이렇게 속으로 궁싯거리며 열심히 찾아봅니다, 아 이놈의 찬장엔 웬놈의 식기류가 이렇게 많은 거야. 3대가 써도 남겠네.. 어, 이거 봐라. 한때 맥주를 좋아했던 저는, 사은품으로 받았던 산토리 프리미엄 몰트 잔을 찾아냈어요. 저기에 맥주 마시면 맛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맥주잔은 우리나라 호프집에서 병맥주 먹을 때 나오는 그 싸구려 유리잔이 제일 맛있어요. 냉동실에 얼려서, 맥주를 부으면 엄청 시원해요. 아사히 드라이 같은 잔도 바디 두툼하고 주둥이 넓어서 좋긴 하지만, 역시 기분 낼 땐 카스랑 하이트잔이 좋지. 음..? 여하튼 저 잔을 찾아내서 종이컵 바닥을 대봅니다, 오우.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아요. 신이 난 저는 일단 첫뜸물을 붓고, 이쯤이면 뜸이 됐겠지 한 시점에 첫물을 붓습니다. 그런데 커피가 내려오질 않네요. 음.. 뭔가 좀 이상할 정도로 안 내려와.. 야. 얌ㅁㅏ.. 즉슨, 유리컵 아가리와 종이컵 바닥이 너무 딱 맞아 진공 상태가 되었던 것이죠. 종이컵 바닥을 살짝 찌그러뜨립니다. 커피가 쑤-욱! 하는 느낌으로 쪽 빠져 내려와요. 오오, 이건 혹시 싸이폰의 원리(..는 아니군). 열심히 내립니다, 사실 커피는 어떻게 잘못보면 간장 같아요. 콜라같진 않아요. 그냥 간장 같아요. 냄새도 간장 같아요. 그냥 간장을 마시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냥 부으면 되잖아. 그냥 밥에 쳐서 계란 후라이 올려서 참기름 떨구고 김가루 올려서 비벼먹으면 되잖아. 아 배고파. 여하튼, 이리하야, 오늘 밤의 커피가 만들어졌어요. 원두판다 no.1 블랜딩이에요. 제가 만든 건 no.2블렌딩인데, 엊그제 필요에 의해 가져왔지만 써먹질 못 했어.. 그래서 집에 그냥 뒀었죠. 커피 맛은. 전용 드리퍼 세트를 이용한 것과 맛은 별 차이 없어요. 어, 괜찮네, 드리퍼 사지마..라고 하고 싶지만 커피 마실 때마다 이런 짓을 한다는 것도 생각해보니 못할 짓이라 그냥 드리퍼 세트를 저렴한 걸로 구매하시는 쪽을 추천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머젼씨 상황이거든요. ..뭐 이러면서 놀았습니다. 밤 열두 시에. -2014. 4. 21

사진 좋아하고 그림 좋아하고 글 읽고 쓰는 것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습니다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