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것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힘으로
세상 어떤 폭력과 불의에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울며 사랑하며 여기까지 왔으니
- 박노해 ‘무릎을 꿇는다’
Ethiopia, 2008. 사진 박노해
내가 자라면서 맨 먼저 배운 일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눈 덮인 초가 집안에 호롱불을 켠
작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주일이면 사제도 없는 작은 공소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아주 작은 공소
아주 작은 신자
아주 작은 소망
아주 작은 힘으로 죽어간 예수
그 작은 것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면
아주 커다란 무언가
내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로부터 내가 해온 일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아주 작고 힘없는 사람들 앞에서
아주 작고 연약한 생명들 앞에서
나는 무릎 꿇는 그 힘으로
세상 어떤 폭력과 불의에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노라고
울며 사랑하며 여기까지 왔으니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