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기를 뚫은 사나이

오늘의 주말 특집, 양성자 빔을 맞은 사나이이다. 아마 내가 유일하게 좋아할 히어로물일 Watchmen(여러번 언급해서 아실 것이다)과 관련된 유명한 대사가 하나 있다. “God exists, and he is American.”(참조 1) 바로 닥터 맨해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잠깐 더 Watchmen 얘기를 하자면 닥터 맨해튼이 어떻게 태어났다? 시계수리공의 아들 존 오스터먼이 물리학자가 되어 연구를 하다가, 실험용 금고 안에 갇혀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몸이 원자 단위로 쪼개졌다가 다시 몸을 재조립하여 살아난다. 그 후로 그는 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게 비슷한 실제 사례가 한 건 있습니다.

https://www.lefigaro.fr/sciences/l-homme-qui-a-mis-sa-tete-dans-un-accelerateur-de-particules-20210108


러시아에 있는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Институт физики высоких энергий, 줄여서 ИФВЭ, 라틴 알파벳으로는 IHEP)에 근무했던 아나톨리 부고르스키(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Бугорский, 1942-현재) 박사의 이야기다. 1978년 6월 3일에 일어난 일이다(참조 2).


당시 30대 중반의 부고르스키 석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해서 연구에 들어갔는데, 당시 입자가속기의 검출 장비에 뭔가 손상이 생겼고, 그는 확인하기 위해 직접 가속기 안으로 들어간다. 당시 소련의 이 연구소에 있는 가속기는 세계 최대였다. 문제는 가속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는 상태였다는 점에 있었다. 양성자 빔이 계속 돌아다니는 상태였다는 의미다.


부고르스키는 가속기가 꺼져있는 상태인줄 알았었다. 문도 열려 있었고, 가속기가 작동중임을 신호로 내줘야 할 전구가 맛이 간 상태였다. 마침 부고르스키는 원래 예정 시각보다 좀 이르게 도착했었다. 그래서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그냥 가속기 안에 들어갔던 것, 양성자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 또한 아닌지라 양성자 빔은 그의 몸을 통과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빔이 그의 머리를 파괴시켰다거나 몸을 조각 조각내지는 않았다. 우리의 아나톨리 페트로비치는 일을 마친 후에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다만 순간적으로 “태양 천 개 정도에 해당할 빛”을 봤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눈을 감았는데도 말이다.


기적적으로? 2 × 3 mm의 입자 빔은 그의 장기나 두뇌, 망막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는 아프다는 느낌은 전혀 없이 그냥 임무를 마치고 보고서까지 작성하고 퇴근했는데…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적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날 곧바로 모스크바 6번 병원으로 실려간다. 방사능에 우연히 노출된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었으며, 이 병원은 나중에 체르노빌 진압에 동원된 소방수들도 받는 곳이었다.


그래서 진찰 결과는? 대략 20만에서 30만 뢴트겐 사이의 방사능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사실 650 뢴트겐 정도에만 노출되도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6번 병원 의사들은 그가 곧 사망하리라 예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빔 노출 부위가 작아서 그랬는지(입자가속기였음을 기억하시라) 올해 78세가 되신 부고르스키는 정정하게 살아계시다. 다만 증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머리에 흉터가 좀 생겼고 얼굴 왼쪽에 경련이 좀 있었으며, 왼쪽 귀가 잠시 안 들렸고 간질 발작이 생겼다. 보고서까지 쓰고 퇴근한 걸 보면 지능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고 말이다. 2년 후에는 박사 학위도 받았다. 왼쪽 얼굴은 움직이기 좀 힘들어졌지만 말이다(참조 3).


이 사건은 소련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야 공개가 됐었고, 부고르스키 박사는 장애인 수당이 안 나온다며 불만을 제기해도 되는(참조 4), 뭔가 바뀐 세상이 됐다. 다면 여기서 추론할 만한 교훈은 세 가지 정도 나온다.


첫 번째,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인이다.


두 번째, 석사였기 때문에 목숨이 달린 일인지 모르는 채 들어가버렸다.


세 번째, 양성자 빔이 몸을 통과하면 박사 논문을 쓸 수 있다.


--------------


참조


1. 원작자인 Alan Moore의 말에서 나왔다. https://www.goodreads.com/quotes/834551-perhaps-in-the-process-of-reconstructing-its-corporeal-form-this


2. 공유한 피가로의 기사에는 6월 3일이라 나오는데, 러시아어 위키피디어에서는 7월 13일이라고 나온다. 여기저기 검색해 본 결과(참조 4) 피가로에 나오는 6월 3일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으며, 실제 사고 묘사 또한 피가로의 기사가 더 자세하다.


3. The Future Ruins of the Nuclear Age(1997년 12월 1일): https://www.wired.com/1997/12/science-2/


4. 역시나 러시아 특유의 관료제가 그의 수당 지급을 막고 있었다. СТАТЬИ : https://archive.is/20130109074924/www.tpp89.ru/metropol/Personalnyi_cernobyl_anatoliy_bugorskog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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