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레옹 제롬의 Réception

주말은 역시 논문이지. 갑자기 19세기 태국 외교에 대해 찾다가 이 그림이 들어왔다. 설명하자면,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이라는 프랑스 화가가 그린, “접견/Réception”이라는 그림이다. 실제 이름은 더 길긴 하다. “1861년 6월 27일,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는 태국 사절단(Réception des ambassadeurs siamois par Napoléon III à Fontainebleau le 27 juin 1861, 참조 1)”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시즌 3까지만 제작됐던 넷플릭스 드라마 “베르사이유(Versailles, 2015-2018)”에서도 정확히 어떤 에피소드인지 기억 안 나지만 아시아 쪽에서 사절단이 온 광경이 연출된 적 있었다. 17세기 파리에 아시아에서 온 사절단? 제아무리 일본이 당시 전세계로 진출했다(참조 2) 하더라도 루이 14세와 직접 만남을?


그 나라는 태국이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및 잉글랜드의 동인도회사와 동남아시아에서 경쟁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태국을 린치핀(…) 삼아 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었다. 다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일본인이 관련된 태국 왕위 계승 쿠데타가 일어나버려 선대 국왕이 추진하던 사업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가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가 다시금 아시아 공략을 하다 보니, 역시 태국과 친하게 지내야 하더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당시 태국 국왕은 몽꿋(혹은 라마 4세), 우리에게 친숙한 명칭으로 부르자면 율 브린너… 아 아닙니다. 뮤지컬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 1956)에 나오는 그 국왕이다. 그의 정책 중 하나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였다.


그래서… 몽꿋 국왕은 대규모 사절단을 영국과 프랑스에 보내는데, 이게 1870년대이다. 그림은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는 태국 사절단의 모습이며, 앞에는 몽꿋 국왕이 보낸 선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리고 태국 사절단은 특유의 부복 자세(지금도 그들은 국왕을 만나면 엎드리다시피 절한다)로 나폴레옹 3세에게 절하고 있다.


특이하다 싶은 점이 보일 것이다. 으제니(Eugénie, 1826–1920) 황후(참조 3)다. 명색이 황제 부부를 접견하는 자리인데, 정작 나폴레옹 3세는 황후의 비서 노릇을 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사실 으제니가 단순한 사모님이 아니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실패했던 멕시코 원정과 아시아 정책을 황제가 아닌 으제니가 입안했다는 비판이 1850년대부터 많았기 때문이다.


그게 루머만은 아닌 것이, 으제니는 저 때 받은 태국 국왕의 선물을 모조리 으제니의 개인실로 가져갔고, 나중에 중국 박물관(Musée Chinois) 실을 별도로 만들었다. 이 방은 지금도 퐁텐블로 궁에 있으며 다른 지도자나 사절단이 오면 거쳐가는 코스가 됐다. 일종의 소프트파워를 전시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막상 파리 엑스포와 맞춰 개최된 1865년 전시회(Le Salon de 1865)에 걸렸을 때 별로 호평받지는 못 했었다. 물론 이 전시회의 화제 작품은 단연코 마네(É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 1863)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다들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막상 프랑스인들이 왜 싫어했을까?


첫 번째, 바로 위에 말한 으제니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다. 승리하기는 했지만 제2차 아편전쟁에 대한 반감도 우리의 편견보다는 상당했었다. 남의 나라라 하더라도 궁전을 불태우는 건 왕정 국가에서 결코 개운한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 복제품이라는 지적이다. 아무리 봐도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명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1807)의 구도와 대단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은 확실히 사이즈가 중요하다. 그림의 크기마저, 다비드의 그림의 한 1/4? 정도밖에 안 된다.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겠다. 1세의 열화복제판이 3세라는 인식이다.


세 번째, 제아무리 부복하여 국왕 앞으로 기어가듯 절하는 것이 태국의 방식이라 하더라도 꼭 그 장면을 캡쳐(…)해서 그림을 그려야 했느냐 하는 비판이 (의외로!) 꽤 있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답변은 존재한다. 영국 국왕에게도 그랬으니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이 오히려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보다는 태국 왕실의 프로파간다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언뜻 봐서는 당연히 프랑스 황실을 드높이는 구성같아 보인다. 나폴레옹 3세 측도 그렇게 간주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복사본과, 황제 부처의 초상화를 같이 시암, 그러니까 태국에 선물로 보낸다.


율 브린너… 아니 몽꿋 국왕은 이 그림과 함께 영국이 보내온 빅토리아 국왕 초상화를 같이 자기 뒤에 걸어 놓았다. 세계구급 일진 두목들이 모두 자기 친구라 선전하는 효과를 낸 것이다. 실제로 몽꿋 국왕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를 꽤 좋아했었다. 최대 경쟁자였으니 말이다. 캄푸차와 라오스 식민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참조 4).


그래서 모든 그림이 마찬가이지만 이 그림 역시 겉보기처럼 단순하게 열그래서 모든 그림이 마찬가이지만 이 그림 역시 겉보기처럼 단순하게 열세였던 아시아의 한 나라와 서구 열강의 불균형을 그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이어갔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서구의 프로파간다를 잘 역이용했다는 점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서구와 일찍 접촉해봤자 현재… 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겠다. 태국은 이미 17세기 때부터 접촉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보다 앞선 시기, 동남아시아 각국과 일본도 서구와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으며, 그 이후로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침체를 겪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본인 이야기 2”의 내용이 바로 그것을 그리고 있다.


이 정도면 매우 학구적인 주말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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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뉴욕대학교 메러디스 마틴 교수의 2017년 논문이다.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0043079.2017.1265287?journalCode=rcab20


다만 나는 아카데미아에서 다운로드 받아 읽었다. https://www.academia.edu/32400144/History_Repeats_Itself_in_Jean_Léon_Gérômes_Reception_of_the_Siamese_Ambassadors


2. 일본인 이야기 1(2019년 12월 11일): https://www.vingle.net/posts/2714887


3. 황제의 편지(2020년 5월 10일): https://www.vingle.net/posts/2946481


4. 후대 왕대의 이야기이기는 한데, 태국은 그당시 영국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캄보디아/라오스 식민화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국이 배신…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버마와 라오스 간 경계를 획정하고 태국은 완충지대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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