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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서관에서 닉 드르나소의 '베벌리'를 빌려왔다. '사브리나' 이전의 작품이다. 사실 사브리나는 내용 측면에서 기대만큼의 놀라움은 없었다. 누군가의 상처가 어딘가에서는 음모론의 도구로 쓰인다는 설정 자체는 좋은 포착이지만, 정작 작가만의 목소리는 조금 미진한 느낌이다. 다만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심플한 느낌의 그림이면서도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었다. 내가 그림 전공자는 아니기 때문에 뭘 모르고 떠드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일정 수준의 스토리와 그림을 혼자서 동시에 해내는 작가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유리 슐레비츠와 같은 그림 동화 작가가 이런 비슷한 놀라움을 준 적이 있다.

그래픽노블에 꽂혀 며칠 전에는 '폴리나'라는 작품도 빌려왔다. 이 작품은 바스티앙 비베스가 지었다고 한다. 요즘은 극에 대한 열망이 커져서, 뭔가를 떠올릴 때 문장이 아니라 장면 자체로 상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다. 소설과 극영화시나리오는 얼핏 서사로 공통되는 비스무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을 읽으며 장면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은 문장의 미학이다. 극에 가까운 소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의 재료는 오로지 문장뿐이다. 문장을 정말 잘 쓰는 소설가들의 소설을 읽으면, 문장의 맛을 느끼게 된다.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극이나 시나리오와는 다른 것이다. 만화와 영화는 그러나 공통된 데가 많아서 그래픽노블과 만화가 극 장르를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언젠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배가본드'를 보면서, 그의 전작인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를 연기한 인물이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같은 작가이니 그림체가 비슷해서이지만, 만화를 영화에 대입해보면 그 인물은 '강백호'도 아니고, '무사시'도 아니다. 다만 작품마다 변신을 해 보이는, 작가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래픽노블과 만화를 한 장르로 묶어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둘 다 훌륭한 장르지만, 얼핏 비슷하다 하여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 혹시 각 장르의 작가들에게 누가 되는 일은 아닐까 싶어서다.

어릴 적에는 만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가령 나는 20대 중반이 다 되어서야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제대로 완독했다. 그 후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을 완독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유명한 만화조차도 뒤늦게 접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우리 집안의 다소 그릇된 독서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만화는 절대 열등한 것이 아니다. 물론 만화라고 다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모든 책이 다 그렇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독서 교육은 읽는 습관을 들여주는 것이 우선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익숙하고 재미있어지면 스스로 좋은 책을 구해나가는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어떤 책이라도 우선 스스로 골라서 마음껏 읽어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독서 습관을 들이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독서 체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릴 적 강제로 읽은 지루한 책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자산이 되지도 못했고, 반감만 키웠다. 책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만이 훗날 겨우 내게 좋은 영향을 줬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도서관을 매일 나가는 것이 결국 공부를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듯이 말이다.


내가 여전히 만화를 잘 모른다는 것이, 읽어본 만화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집안에서 만화를 금지한다고 해서 꼭 못 읽을 것도 아니고, 숨어서 읽을 수야 있기도 했겠지만 그때 나는 어지간히도 독서라는 행위에, 아니면 내게 강제되는 것들에 이골이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조금씩 섭렵해가야겠다.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모른다는 것은 아직 맛볼 좋은 작품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다른 독서 근육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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