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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평일 대낮에 영화관에 갔다. 영화는 박근영 감독의 '정말 먼 곳'이었다. 관람객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고, 모두 혼자였다. 영화는 정말 좋았다. 시인이 쓴 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제목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먼 곳'의 '정말'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문맥상 부자연스럽다는 게 아니라, 그 뉘앙스가 좀 서툰 느낌이다. 차라리 '너무 먼 곳'이었으면 어땠을까.


이 영화의 전부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핍박받는 성소수자의 서사를 보고 있자면 또 퀴어인가 라기보다는 언제쯤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뀔까 라는 생각이 든다. 바뀐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한국에서의 퀴어 서사는 여전히 불온한 것을 바라보는 정상인(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배경에 깔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더는 소수자가 아니게 될 때, 그냥 평범한 사회의 일원이게 될 때 오히려 더 다채로운 퀴어 서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퀴어 서사는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갑자기 엉뚱한 말이 떠오르는데,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클리셰 하나를 타파하기 위해 온 사회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영화에는 굳이 분류하자면 서사를 구축하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들이 어느 하나 더 중점을 두고 있지는 않고, 공평하게 맞물리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퀴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것은 감독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퀴어라 명명되는 동성애도 삶의 여러 단면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나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훔쳐보는 것이 좋았다. 언제부터 나는 이런 담담하고 고요한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걸까. 정적이 있는 영화. 어떤 식으로든 정적을 영화에 담아내는 감독이 좋다. 나는 근무 특성상 평일 낮에 시간을 내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데, 평일 낮은 어디를 가도 손쉽게 정적을 발견할 수 있다. 평일 낮에 미술관을 가 본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가의 전시회든 평일 낮의 미술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시물은 정적이다. 그 정적의 정체가 뭔지 쉽게 정의하기는 힘들다. 여유일까? 단순히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조금 복잡하다. 평일 낮에 대공원을 산책하는 것, 산을 가는 것, 혹은 가까운 사찰에 가는 것, 도서관 뒤쪽의 숨은 공간을 서성이는 것, 낯선 동네를 걷는 것. 뭐 요즘은 평일 낮이라도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기야 하지만, 상대적으로는 분명 거기에도 정적이 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순간들. 여백이라고 해도 좋고, 행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그 순간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낙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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