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담당 일진 세종대왕

어제 대왕님이 소금 때문에 실패한거 썼으니까 이번엔 잘 안 알려진 군사적 업적도 써야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국제적인 스케일의 큰 전쟁이어서 묻히는 감이 있는데 조선이랑 가장 많이, 오래 싸운 국가는 북방의 여진 부족들이었다


사실 여진족은 인구수만 따지만 조선 초기랑 엇비슷할 정도였지만 부족끼리 나뉘어 통합되지 않았을뿐더러 땅이 척박하고 농사기술도 떨어져서 반농 반유목 + 약탈을 해야했다


여진 부족 수십개가 이리저리 협력과 배신을 밥먹듯이 반복하며 수시로 쳐들어오자 주적을 여진으로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병력을 구성했고 그래서 조선의 주력병력은 여진의 기습에 대응할 기동성 빠른 기병(창기병 40 + 궁기병 60)과 궁수가 중심이 되었다


수시로 조선을 약탈하며 힘과 영향력이 쌓이는 유력 부족이 생기고 구심점되어 여진이 연합하려고 하자 세종대왕은 대대적으로 칼을 빼들기로 했는데 단순한 보복을 넘어서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어붙이고 강을 경계로 국경을 안정시키기로 결심했다


예나 지금이나 평야보다는 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이 안정적이고 지키기 쉬우니까

세종은 긴밀하게 부족간 외교를 벌여서 친조선 부족과 반조선 부족을 나누어놨고 여진이 준비할 틈을 주지않기위해 바로 만 오천 정예병을 꾸려서 북진시켰다


길잡이 겸 보조병은 친조선 부족이었는데 조선의 공격이 너무 빠르게 시작되었고, 예전에도 자주 있었던 단순한 보복전으로 착각하고 있어서 여진 부족들은 큰 혼선을 빚었음


혼란의 와중에 큰 규모의 친조선 부족의 족장이 전투에 휘말려서 아들과 함께 조선군에게 전사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세종대왕은 냉정하게 혼란에 빠진 친조선 부족을 흡수, 편입시켜버렸다


빠른 기습과 외교적 성과에 힘입어 조선은 강을 경계로 4군 6진을 개척했고 곧이어 알박기에 들어갔음

조선이 알박기에 들어가서 진을 만들고 마을을 개척하고 이주를 보내자 급해진건 거기서 수백년간 살아왔던 여진족이었다


세종은 처음부터 "우리가 알박으면 개때 같이 몰려올테니 200년은 막아야 진짜 우리것이 될것"이라는 빅픽쳐를 그려놨고 필사적으로 땅을 되찾으려는 여진과 이걸 막는 조선군이 처절하게 싸우고, 계속 이민자들을 올려보내며 결국 개척에 성공했다


세종은 이민자들을 모으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하였는데 이민자 중 양반은 벼슬을, 중인과 양인은 부역 면제, 천인은 면천하여 양인으로 만들어주었고 이 덕분에 평안도 쪽에서 자발적인 이주민이 많아 큰 혼란 없이 대규모 이주단을 만들어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범죄자들 중에 형벌을 면하는 대신 이주를 선택한 경우에는 이런 혜택이 없었다고 하며 중죄를 지은 사람은 선택지도 없이 강제이주였음

세종의 뒤에 세조 때가 되면 조선은 세종의 유화 + 강압 균형에서 벗어나 초강경적인 노선을 택하는데 일단 200명이 넘는 첩자를 보내고, 계속 정탐을 보내 자세한 지도를 만들게 했다


첩자와 정탐병이 여진에게 들키면 바로 죽임을 당했음


여진에 유력한 족장이 생겨나 다시 뭉치려고 하자 세조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싹을 밟아버리려고 했는데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서 여진정벌은 잠시 중단되었고 이 병력은 그대로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 미숙했던 조선군의 경험과 사기가 크게 올라갔고 이 병력이 그대로 여진으로 넘어가 초토화 적전을 쓰기 시작했음


세종때는 외교적 영향을 고려해 보복을 하더라도 도망치는 사람은 잡지 않았고 불을 질러도 가능한 사람을 다 빼내고서 전소했는데 세조 때는 여자와 개까지 학살했다고 한다


여진족의 유력 추장이 부족을 연합해 조선을 몰아낼 생각으로 아들들과 부하 백명 정도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순회할 때 조선은 예전에 뿌려놓은 스파이들로부터 정확한 위치와 경로, 시간을 파악했고 만병의 병사로 유력 추장이 머무르던 장소를 기습 포위해버렸다


추장과 아들들은 조선군의 육모 방망이에 사이좋게 맞아죽었고 조선군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략한 소와 말을 끌고 조선에 돌아왔다


세조의 정벌로 4군 6진을 되찾으려던 여진의 시도는 분쇄되었고, 명백하게 조선 땅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너무 약탈, 살해, 납치를 즐기고도 외교적인 대응은 세종 때보다 부족해서 몇몇 친조선 부족들이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종이 정치 문화적 업적 외에도 군사도 충실하게 잘 키워놓았는데 수백년을 앞선 큰 그림을 그려놓았고 결국 성공하게 되었다


마무리는 세조가 냈지만 그 군사를 키워둔건 세종이었기 때문.


조선은 여진을 상대로 착실하게 군사적 업적을 쌓았는데 조선이 보낸 스파이나 기습 포위, 학살 같은 기록은 조선보다 여진이나 중국쪽 기록에 자세하게 남아있다


조선 역사 연구는 조선왕족실록에 많이 의존하는데 조선은 덕치주의를 표방한 국가였고,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런 전쟁들을 굉장히 간략하게 서술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경향이 보임


출처



여진 담당 일진이었던 조선

하지만 기록은 남기고 싶지 않았지 ㅋㅋ

임진왜란 아니었으면 청도 없었을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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