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달래드립니다. 1화

금요일 밤 11시50분 이태원.



친구놈과 가볍게 1차를 마치고 붉어진 얼굴로

이태원 라운지 바 '포레스트'의 긴 줄에 서있습니다.


친구: "야 오늘 느낌 좋아."


설레발치는 친구의 말에 속내를 감추고  무심한 척 했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이름 모를 하얀 그녀와

은밀한 접촉을 하고있었죠.


입장할 순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시선엔, 창가쪽에 앉아있는 하얀 탑을 입고

좋은 향이 날것만 같은 여자가 앉아있었습니다.


제발 둘이어라.. 제발.. 둘..



이어서 반대쪽 빈 의자에 금발을 한 여성이 착석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연일지라도 기필코 인연으로 만들겠나이다.


옆에 친구놈에게 독화술로 긴급한 내마음을 전합니다.


나: "오른쪽 위. 오른쪽 위. 아니 병신아. 반대쪽."


자연스레 스캔을 한 친구는, 츄르를 본 고양이의 눈처럼 동공이 확장되더군요.


우리는 어떤 대화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피차 목적은 다를 수 없으니까요.



드디어 입성!


합이 이루어지는 술집 특성상, 새로운 손님이 들어올 때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여기서 그 시선들을 느껴버리곤 두리번 두리번

이 집, 저 집 테이블을 훑는 것은 나의 격을 추락시키죠.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않고 정해진 나의 길을,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빠르게와 느리게의

그 어딘가의 템포로 걸어갑니다.


제발.. 제발.. 나이스!


인연을 피어낼 여자의 뒷 대각선 테이블.


자연스레 눈이 마주칠수 밖에 없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밖에 없는.


알바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술 다 먹고 테이블까지

정리해드리고 나갈게요. 꾸벅.


좁은 테이블에 메뉴판과 기본 안주가 세팅됩니다.


컵을 나누어 물을 따르고, 곧바로 컵을 집어듭니다.


네, 사실 목이 전혀 마르지 않습니다.


밍밍한 물을, 무슨 에스프레소를 마시 듯

컵을 얼굴에 바짝대고 입술만 적시며

술집 안을 스캔합니다.


우리의 레벨을, 우리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견적 끝. 뭘 해도 되는 날이다.




친구 : "뭐 먹을래?."


나 : "너 먹고 싶은거. "


주문한 안주와 술이 나옵니다.


아주 조용하고 예의 바른, 또 꾸며지지 않은 진심을

담아 알바생에게 건냅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의 서브텍스트는, 친구놈의 어깨 옆으로 보이는

그 여자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귀가 쩡쩡거리게 떠드는, 또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뱉는 예의없는 저 테이블의 미물들과는 달라.


난 기본 예의와 매너를 갖춘 남자야.


사실,  다 집어치우고 친구놈이 정말로 정말로

잘생겼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칩니다.


친구놈의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흘려보내고,

횟수를 늘리며 그쪽을 응시하죠.


엇! 잠깐 그쪽 테이블에 등을 보이던 여자2도 갑자기

몸을 틀며, 둘이 함께 이쪽을 바라봅니다.


그러곤 또 다시 둘이 속닥입니다.


뭐지..?


저는 다급하게 친구를 툭툭 치고 고갯짓으로

여자 테이블을 가르킵니다.


자! 친구야! 어서 네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그 얼굴을

비추거라.

친구놈은 훈훈한 미소로 민들레 홀씨를 날려보냅니다.



1차전 종료.


다시 각자 테이블의 상대를 마주보며

무미건조한 담소를 이어갑니다.


모든 신경은 상대 테이블에 세운 채로요.

마치 스키점프 출발 직전의 마음으로.



친구놈은 본인의 상태를 정비하고 온다며

화장실로 향합니다.


볼 것도 없는 폰을 의미없이 만지작 거립니다.

하도 많이 봐서 같은 게시물만 올라오는 SNS.


아 이 친구놈 언제오지.


나올 기미가 없어보입니다.

다시 고개를 내려 만지작 만지작 폰을 보려는데,


두근거리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시선이 느껴진 곳은 역시나 그 여자 테이블.


이 날  이 시간에 여기서 눈을 맞추기로 한 것처럼,

부끄럽지만 흔들림 없이 직선으로 뻗은 서로의 눈맞춤.


이번엔 피하지 않고 지긋이 보겠습니다.


'피식'


어? 웃은 건가? 나보고 웃는 건가?

아 렌즈 끼고 올 걸..

근데 나는 왜 웃고있지?


그렇게 3분같은 3초 정도를, 30%정도의 미소만을

띤 채 서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화장실에서 나온 친구가 봤는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오기도 전에 여자 테이블로

향합니다.


잘은 안들리는데..


친구: "이제 같이 먹을 때 됐다. 이리로 오세요."


여자2: "네!?"


끝내 못이기는 척 이쪽 테이블로 넘어옵니다.


이 어색한 기류. 누군가 날려줘야 하는데..

이건 내 담당이 아니다.  친구야 도와줘.


간단하게 서로에 대해 소개를 이어갑니다.



여자: "그냥 필라테스 가르치고 있어요."



아 필라테스 강사였구나.


어쩐지 흰 탑 위로도 보이는 깊은 곡선들의 균형이

완벽하더라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불과 20센치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여자.


거침없이 휙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벙긋 물어봅니다.


여자: "뭐해요 오빤? 그냥 오빠라고 할게요."


오빠? 아직 나이도 공개안했는데 오빠라고?.


나: "아 네네."


그건 그렇고 나더러 뭐하냐고 물었지.

뭐라고 대답하지.


'시나리오 작가예요.' 아니야.

'어떤 거 썼어요?' 등의 꼬리 물기 질문으로 곤란에 쳐할 수도 있어.


나: "그냥 어, 글써요."



여자: "우와 근데 막 야설 같은 거 쓸 것 같아."


10명 중 9명에게 돌아오는 똑같은 대답.


그놈의 '야설'

정말 야설이라도 써야하나 후.


덕분에 풀린 분위기.


벽이 허물고 이젠 더 과감히 숨김없이 웃으며

술잔을 비웁니다.


슬슬 취끼가 올라오는 자리.


떨어져 있기엔 썰렁한 초가을 날씨가

남녀 한쌍을 더 가까이 밀어줍니다.


어느새 서로 손에 깍지를 끼고있는

친구놈과 여자2.


너넨 어렸을 때, 서유럽에서 자랐니?


****


새벽 3시, 술집을 나옵니다.


알콜에 새벽 이슬이 더해져 흐느적거리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친구놈은 이미 알콜 만땅이 되었습니다.


옆에 꼭 붙어있는 여자2도 더 이상 술집은 갈 수

없다는 듯이 친구놈에게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있습니다.


고요 속에 이미 형성된 분홍빛 무드.


하지만 빠질 수 없는 여자들의 우정이 빛을 바랍니다.


여자: "야 정신차려. 이리와."


친구놈은 여자2의 어깨를 부여 잡고선

다른 한 손으로 볼을 어루만집니다.


여자2는 친구놈의 부드러운 촉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붉어진 얼굴로 베시시 아이의 웃음를 짓습니다.


저 멀리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소리도 없이 낮은 포복으로

택시 한대가 스윽 다가옵니다.



아니 기사님? 저희 손도 흔들지 않았는데?


택시 기사님: "안 탈 거예요?"


이태원 바닥에서 십수년 이상의 짬을 먹은

베테랑 기사님의 눈칫밥이겠지요.



친구놈은 자연스레 여자2를 택시 안쪽에 태웁니다.


곧바로 이어서 탑승하는 친구놈.


택시 안으로 머리를 구겨 넣기 직전 저를 쳐다보네요.


국정원 요원이 작전에 투입되기 전

서로를 바라보고 비장한 고갯짓과 함께

작전을 개시하는 것처럼.


'끄덕' 하더니 문을 닫습니다.


문틈사이로 삐져나온 말이 들려옵니다.


'신촌으로 가주..'


잘가라 친구야. 네 몫의 우정은 다했으니

멀리 멀리 영영 떠나가라.



덩그러니 남겨진 여자와 나는

처음 합석할 때처럼 또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흐릅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움직이는 것 조차 어색한 게

내 자신에게도 느껴집니다.


어서 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머리야, 어서 이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단어를 생각해!


나: "카페 갈래?"


아, 이 병신아. 이 시간에 남녀 한쌍이 갈 수 있는

목적지는 단 하나 뿐이잖아.


난 그곳에서 오늘의 종지부를 찍고싶다고.


내가 뱉은 빵점짜리 질문에 여자의 얼굴에

잠시동안 물음표가 만개했습니다.


이어 4살 연하의 남자를 보는 듯한

모성애 담긴 눈빛을 하더군요.



여자: "오빠는 진짜 착한가보다. 난 착한 사람이 좋아."



멍청하다는 걸 돌려 말한건가?

아니야. 난 착하지 않다고.


내면엔 누구보다 진한 핑크빛 욕망이 있다고!


아 이게 아닌데..


카페로 향하는 걸음엔 후회와 자책이 가득 실려

벌어지는 보폭은 불과 20cm 남짓.


터벅 터벅.


잠깐 멈춰 세우고 싶은데, 도무지 어려운 한글은

아무런 단어도 던져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등 떠밀려 온 것처럼,

카페 건물 1층에 도착합니다.


먼저 올라가는 여자.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나풀거리는 흰 테니스 치마.


올라가는 리듬에 맞춰 살랑살랑 보이는 속살이

나를 간지럽힙니다.


아 두 계단만 아래서 갈까.


카페 자동문이 열립니다.


새벽 3시를 훌쩍 넘었지만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인지

빈자리가 많진 않습니다.


나: "뭐 마실래?"


여자: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라메리카노 2잔을 시킨 뒤, 착석합니다.


여자는 먹지도 않는 커피를 들고 괜한 빨대만

콕콕 씹어댑니다.


빨대를 문 채, 입을 씰룩거리는 게 분명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여자: "오빠 술 다 깼어?"



나: "응 갑자기 멀쩡해졌어."



저 질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혹시 나와 같은 미래를 생각하고

우리의 남은 새벽을 야릇하게 이끌어줄 취기가

남아있냐는 뜻일까.


아니면 술도 다 깼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걸까.


여자: "괜찮으면 우리집 가서 한 잔 더 먹을래?"


나: "어?"


순간 모든 신경다발이 멈췄습니다.


모든 신경물질들이 급속도로 하체의 한 곳으로

몰집합니다.


생각치도 못한 전개에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현관에 들어설 때 부터의 동선을 미리 생각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감싸안고..


여자의 목덜미 옆으로 내 얼굴을 닿을 듯 말 듯

아찔하게 포개고..



절제된 호흡으로 여자의 귓가에 야릇한 호르몬을

보내고..


갓난 아이를 보듬듯, 조심스레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마디마디 천천히 올라가 후크를..


뚝.



나: "좋아. 지금 갈까?"


여자: "남은 것만 마시고 가자."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박동수가 오르내립니다.


어서 당장 쪽쪽 다 빨아먹어.


술집부터 화장실을 한번도 안간 탓인지 급해집니다.

내 상태도 정비가 필요한 타이밍.


화장실로 향합니다.



정성스레 만든 반 깐 머리를 방해하는 잔머리를

정리하고, 옷 매무새를 다듬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눈에만 보이는 잘생겨보이는 각도로 

거울에 비친 나를 체크합니다.


Ok.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갑니다.


어라? 맞은편 여화장실에서도 문이 열리네요?


시선을 낮춰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의 바디라인.


그리고 특유의 향수와 샴푸냄새의 섞임.

에이 설마 아니겠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장실에 나온 사람을 봅니다.


그 사람을 본 순간,


식물인간이 된 듯 모든 사고가 불가능했어요.


네가 왜 여기있어?

지금 여기서 만나면 안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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