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달래드립니다. 3화




나: [서윤아, 왜 말이 없어..]


지난 2년동안 새벽만 되면 코끝이 시리다 못해 아려왔는데,


서윤이도 조금은 나와 같았을까요?


입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에 응어리가 진 듯 먹먹해집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요란한 주변 소리만 들려옵니다.


아마 잔뜩 술을 먹고, 취기에 술집 안에서 전화를 건 모양입니다.


......


잠시 후, 걸죽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감독: [어 연결 됐었네. 김작가님! 저 조감독입니다.]


누구야 당신? 왜 당신이야?


지금 그 전화 한통 때문에 오늘 하루가 엉망으로 끝이 났는데?


다시 돌려내, 30분전으로 당장.



나: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조감독: [이거 어떡하죠? 남자 배우가 크게 사고를 쳤나봐요.]



나: [네? 이미 촬영 들어간 걸로 아는데, 어떤 사고요?]



조감독: [그게.. 음주운전 사고를.]



나: [그럼 언제쯤 촬영 재개할 수 있나요?]



조감독: [이미 한두번이 아니라서 더이상 배우 이미지가 영화와 맞질 않는다고 홍감독님께서..]



헉 내 첫 작품이 설마 이렇게?



나: [설마 아예 엎는 건 아니죠...?]



조감독: [그건 아닐 거 같고, 주연 배우 오디션을 다시 볼 거 같습니다.]



나: [남자 배우만 다시 캐스팅하는 거겠죠? 서윤씨는 그대로 가는 거죠?]



조감독: [네네.]



다행이다. 서윤이가 캐스팅 됐다고 엄청 좋아했을텐데.


그리고 사고친 남자 배우, 그 놈은 안 될 새끼예요.


계란 노른자 처럼 생겨서 여우짓이 몸에 베어있더라고요.


그런 놈에게 우리의 진중한 스토리를 맡길 뻔 했네.




조감독: [아 작가님! 한가지 더 전달할 내용이 있는데요. 홍감독님께서 이번 오디션 심사 좀 같이 봐달라고 하셨어요.]



나: [헉, 제가요?]



조감독: [네. 시나리오 감정선을 누구보다 잘 아시니까, 그 감성에 걸맞는 배우좀 찾아달라고. 하하하]



하늘이시여, 나에게 이런 기회를!



나: [네네,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조감독: [일정은 메시지로 넣어 둘게요. 밤 늦게 죄송해요. 푹 쉬세요!]



본래 제가 참여한 시나리오 공모전은 대상을 수상해야만


작가로서 제작, 기획 참여가 가능했습니다.


제 시나리오는 4등에 그쳤기 때문에 조촐한 상금뿐이었죠.



그런 나에게! 오디션 심사라니!


혹시 이러다 제작, 기획을 맡는 건가?


생각만해도 촬영장에서 열 띤 제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렇게 앞서 일어났던 일들은 까맣게 잊고,


들뜬 마음으로 새벽녘 신림동 골목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합니다.



"기사님, 신논현 역으로 가주세요."



******



오전 11시.


수상 상금으로 얻은 투룸 월세방.


혼자 사는 남자의 집은 지저분하고 탁한 냄새가 날 것이라는 관념에 포함되고 싶지 않아,


꾸역 꾸역 인테리어 앱을 통해

제법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유일한 나의 안식처이지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리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곧바로 훌러덩 팬티를 내던진 뒤, 화장실로 직행합니다.


샤워타월에 과하게 바디워시를 짜넣고,

구석구석 벅벅 밀어 냅니다.


내츄럴하게 헤어 에센스로만 스타일을 내주고,


조x론 우드세이지로 은은한 살갗 냄새로 나갈 채비 끝.



사실, 굳이 나가야 되는 일은 없지만  그런 날 있잖아요?


괜히 실바람 맞으며 거리를 거닐고 싶은 날.




A4용지로 출력해 놓은 시나리오와 맥북을 챙겨


신논현역 부근 카페로 향합니다.



******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등을 기댈 수 있는 구석 자리에 앉습니다.


당장 내일이 오디션 심사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훑어 봐야 합니다.


과연 내일 어떤 배우가 오디션을 보러올까.


그때의 우리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한편으론 마음이 착잡하지만, 이왕이면 이야기 속 나를 완벽하게 대신 해주었으면 합니다.


생각 정리를 끝내고 시나리오를 펼칩니다.



♪♪


카톡이 울립니다.


미리보기를 보니 '사진 한장'과 함께 은비에게 톡이 왔네요.



'뭐하니 오빠. 난 수업 중~'뭐하니 오빠. 난 수업 중~'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까요.


솔직한 제 심정은, 아직 은비와 그 이상의 진전은 원치 않아요.


서윤이와 잠시 마주친 것 뿐인데도


내 속을 헤집는 것을 보니,

새로운 만남에 대한 준비가 아직은 덜 됐다고 할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어쩔 수가 없나봐요.


자꾸만 저 사진 한장이 궁금즘을 유발하네요.


음.. 그래 아예 안 읽는 것도 좀 그렇다.


확인하고 무미건조한 답장으로 티를 좀 내야겠다.


자기합리화 끝.


......



요가복을 입고 찍은 전신 거울 셀카.


그렇지.. 필라테스 한다고 했지. 


오..


입이 자꾸만 멋대로 O자 형태로 벌어집니다.


의지와 상관 없이 두 손가락은 확대를 시도합니다.


곱게 뻗은 어깨라인에, 물이 고일 듯한 깊고 선명한 쇄골.


가녀린 체구에 버거워 보이는 그녀의 가슴을

굳게 지탱해주는 스포츠 브라.


음푹 패인 허리와 매혹적인 라인을 그리며

노골적으로 솟아 있는 골반.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탄탄하고 매끈한 몸매.


가히 완벽한 균형에, 과하지 않은 굴곡들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네요.


내가 이런 여자와 어젯밤 불장난을 했다니..



이왕 본김에, 슥슥 다음 프로필 사진으로 넘겨봅니다.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나봐요.


풍경아래 활짝 웃고 있는 사진들이 참 많습니다.


어두운 면이라곤 없을 것 같은 순도 높은 웃음이 참 예쁘네요.


보는 사람이 맑아질 정도로.



요즘 과즙미라고 그러잖아요?

은비라는 친구와 딱 들어맞는 말이네요.


어..이렇게 적나라게 비키니 사진을 프로필에..


남자란 동물은 별 수 없는 것인가.




워워 이쯤하고! 지금 이럴 시간 없어.


정신을 붙잡고 답장을 합니다.


은비에겐 미안하지만, 조금은 냉철하게.


볼 일 보러 잠시 카페 왔어. 수업 열심히 해.'볼 일 보러 잠시 카페 왔어. 수업 열심히 해.'


묘하게 신경이 쓰이네요.


우선 무음으로 돌려놓자.



스읍 후. 심호흡으로 심신을 진정시키고.


자자! 다시 시나리오에 열중해볼까요.


표지를 넘기고, 제목이 보여집니다.



[스물 아홉에 우린]



진부하기 짝이없는 제목이죠?


서윤이와 내가 끝맺음을 지을 때,

그녀에게 건내받은 말이 있었어요.



'스물 아홉에 다시 만나자 우리'



참 웃기지도 않은 말이죠?



이별을 겪은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에겐

한심하기 짝이없는 말로 들릴 거예요.


한낱 풋사랑에 지나는 말 뿐이라고.


하지만 이별을 겪는 당사자에겐,

하루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슬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무너져 버리다가도,

'우린 다시 만날거야' 라는 무책임한 희망이

다시 일으켜 세우죠.


그리고 그 희망은 어느새 옥죄가 되어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사랑에 반대되는 삶 속에서

매번 홀로 사랑을 해오다 어렴풋이 깨닫게 되지요.


결국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 서윤이가 건내준 그 말,


'스물 아홉에 다시 만나자 우리'.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이 시나리오도 없었을 겁니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 끝에 그리움이란 감정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때 이후로 '스물아홉' 이라는 나이 혹은 숫자가

조금은 특별해졌습니다.


시나리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죠?



[스물아홉에 우린]



공교롭게도 현재 제 나이는 스물아홉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엔 또 다시 서윤이가 있네요.


그녀는 '스물아홉'의 약속을 기억할까요.


......



잠시 멍하니 회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이어폰을 뚫는 데시벨로 나를 부릅니다.


어? 호.. 홍..감독님?



홍감독 : "김작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안녕하세요 감독님! 시나리오 좀 볼 겸 왔습니다."



홍감독: "그래? 그럼 같이 올라가자고."



나: "네? 어딜요?"



홍감독: "이 건물 9층이 우리 사무실이잖아."



여기가 제작사 사무실이었어?



홍감독: "가자고, 지금 위에 다 와있어. 배우들까지."



나: "저 감독님.. 그럼 혹시 서윤씨도 계신가요?"



홍감독: "그럼 당연하지, 일어나 올라가지."



내가 아야기의 작가인 걸 알게 됐을 때,

서윤이의 심정은 어떨까요.


그것이 만에 하나 좋은 영향이 될지라도,

중요한 시기에 그녀를 뒤꼬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 "어쩌죠. 급하게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요."



홍감독: "어허 이사람이~ 후딱 일어나서 따라와."


안타깝게 내 위치는 의견을 따르는 곳이지,

의견을 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나: "넵."



언뜻 보아도 영화 관계자의 포스를 풍기는 분들과 함께

엘레베이터에 탑승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많은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져 있는 입구가 보입니다.


시골 촌놈이 상경한 듯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무를 보시는 분께서 미팅실로 안내를 해주시네요.



쭈뻣쭈뻣, 전입 온 신병처럼 당차게 인사를 드려야하나?



홍감독: "자자 잠깐 시간좀 뺏을게요. 여기는 김작가님.

이번 영화 [스물아홉에 우린] 쓰신 작가."



"이쪽은 카메라 감독님, 여기는 일전에 통화 나눴던 조감독

저쪽은 음향 감독, 조배우, 황배우 ~"


손수 인사를 시켜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시나리오 정말 좋아요." 등의

감사 인사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홍감독님은 아차 하며 뭘 빼놓으 신 듯, 테이블 가장 구석 쪽을 가르킵니다.


홍감독: "마지막으로 이번 영화 주연 배우인 우리 서윤씨. 대충 전해 들었었지?"


아... 숨고싶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한장면 한장면 천천히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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