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올림픽여자배구 4. 페이스북 곽한영 교수


- 올림픽 여자배구 이야기4 - 한계를 넘어서(Limit Off!)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객관적인 전력에서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벨기에를 우회하여 프랑스로 진격하는 ‘전격전’을 펼친다. 말그대로 번갯불처럼 빠른 속도를 핵심으로 하는 전략이었는데 ‘공수부대 투입으로 방어진지 무력화-공중폭격-전차부대 진격-보병부대의 거점 접수’라는 루틴을 무한반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말만 들으면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루틴으로 프랑스 전역을 단숨에 제압하는게 가능해보이지만 문제는 사람은 톱니바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속도가 생명인 전격전에서 밤낮없이 전투와 행군을 반복하는 것은 길어야 며칠이면 한계에 도달한다. 그래서 전격전의 루틴에 반드시 고려되어야할 또 하나의 ‘장비’는 ‘페르비틴’(pervitin)이었다.


. 독일의 제약사 테믈러 베르케에서 생산, 공급한 페르비틴은 간단히 말하면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었다. 독일 군인들은 마약에 취한 채 ‘슈퍼 솔저’가 되어 밤이 되어도 쉴 생각도 안하고 전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전투 머신’으로 프랑스 전장을 휩쓸었던 것이다.


. 여기까지는 꽤 널리 알려진 사항이고 2차 대전이 아니라도 전쟁 중에 군인들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에서 대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약물이 군인들을 ‘초인’으로 만든다는 생각이다. 약물을 투여했더니 비실비실해서 징병검사조차 통과못했던 약골 청년이 아이언맨도 맨주먹으로 때려눕히는 초능력자가 되더라는 ‘캡틴 아메리카’의 설정이 이런 관념의 대표적 사례.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칼슘으로 된 뼈가 쇳덩이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단백질로 된 근육이 돌덩이가 될 리도 없다. 결국 인간의 능력 그 자체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 그렇다면 마약이 갖는 효과는 뭘까?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지상명령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시그널에도 빠르게 대응하고 문제를 피하도록 프로그래밍되는 것이 당연하다. 신체의 능력과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 실제로 신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치의 한계지점은 상당히 남아있지만 그 경계선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능력을 봉인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1톤 트럭은 실제로는 1.5톤, 2톤 까지도 실을 수 있지만 안전수준을 고려해서 적재중량을 1톤 수준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다(이 타이밍에서 갑자기 1톤 트럭이라고 진짜로 적재한계를 1톤 근처로 만들었다가 험악한 대한민국 화물환경에 박살이 나고 퇴출된 삼성자동차의 ‘야무진 트럭’의 비극이 떠오르고..). 자식이 자동차에 깔려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부모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자동차를 들어올렸다는 식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할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한계치를 개방해버려서 낼 수 있는 힘의 최대치를 낸다는 것이지 슈퍼맨처럼 원래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 아니다. 수치의 정확한 계산근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그래서 인간은 통상 자신의 능력 한계치에서 20% 수준에서 제한을 건다고 한다. 즉, 마약은 이런 안전장치, Limit를 Off 시키는 방식으로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이며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장기간 유지하면 몸이 고장나게 되는 것이다.


. 앞선 글에 썼던 것처럼 우리 여자배구 대표팀은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도저히 예선통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바리니 감독이 아무리 신박한 작전을 쏟아낸다 해도 선수들이 그걸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 만사무용한 일이었다. 특히 ‘쌍둥이 사태’를 겪으면서 팀 전체적으로 내상이 너무 컸다. 어떤 분은 문제있는 친구들이 나갔으니 팀이 더 잘 결속되지 않았겠나 말씀하시던데 여긴 국화부 친목배구모임이 아니고 국가대표 배구팀이다. 차라리 성질이 더럽더라도 실력있는 선수 한 명이 중요하지 인성좋고 잘 웃는데 리시브도 안되고 스파이크도 안되는 선수들끼리 모아놓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특히 갑작스럽게 콜업된 멤버들의 삐걱거림이 심했다. 염혜선, 안혜진 세터의 문제는 이미 길게 설명했으니 넘기고, 또다른 문제는 김연경과 함께 레프트 한자리를 추가로 맡은 박정아와 라이트의 김희진이었다.


. 박정아는 특유의 팔을 미리 뒤로 제껴두었다가 때리는 큰 공격에 강하고 키도 큰 편이지만 속도가 느리고 체력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마 오늘 중계 중에 해설자가 ‘클러치 박’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적어도 한 번 이상 들으실텐데 위기 상황에 강하다는 칭찬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위급한 상황이 와야 비로소 능력이 발휘되는 슬로우 스타터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소속팀인 도로공사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정말 뼈를 갈아가며 리시브를 하고 있는 문정원 선수를 볼 때마다 왠지 미안해하는 느낌을 읽을 수 있는데 그런 미안함, 나는 리시브를 잘 못해 라는 생각이 하나의 틀이 되어 박정아의 플레이를 둔하게 하는 느낌이었다.


. 김희진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자타가 공인하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고 결정력도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추고 제자리걸음 때로는 퇴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선수였다. 별다른 근거 없이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말하자면 왠지 배구올스타전에서의 사건 이후에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대개의 스포츠에서 올스타전은 그냥 스타들을 한자리에서 본다는 정도의 의미만 갖는 재미없는 이벤트지만 배구만큼은 챔피언결정전보다 올스타전이 더 재밌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이유는 별다른게 없고 배구 선수들이 정말로 ‘혼신을 다해’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배구는 꽤 오랜 기간 팬들의 외면을 받는 암흑기를 거쳤기 때문에 팬서비스에 대한 마인드가 남다른 편인데 올스타전을 하면 춤, 노래, 코스프레는 기본이고 온갖 이벤트로 선수들이 망가지면서 팬들을 기쁘게 한다. 심지어 근엄하기 이를데 없는 이정철 감독, 신진식 감독조차 올스타전에서는 당연히 춤을 비롯해서 시키는 건 다해야한다고 생각할 정도.


. 그런데 촛불시위로 뜨거웠던 2016-17 시즌 올스타전에서 김희진은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최순실의 코스프레를 했다. 워낙 잘 어울렸고 본인도 최선을 다해 연기했기 때문에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지만 정작 행사가 끝나고 난 후 태극기 부대를 비롯한 보수세력들의 집중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순수한 스포츠에 더러운 정치적 의도를 끌어들였다’는게 비판의 포인트였는데 김희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는게 비판 자체도 말이 안되는데다 애초에 배구연맹에서 ‘최순실 코스프레 하면 재밌을 거 같은데 누가 할래?’라고 제안했다가 아무도 안한다고 하니까 총대를 메는 마음으로 ‘제가 할께요’ 한 것이 이런 역풍을 맞은 것이었다. 결국 연맹 차원에서 공식 사과문을 내고 김희진과 기업은행 팀은 조직적인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원래 이 사건 전에 김희진 선수는 대단히 밝고 유머러스한 선수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경기중에 웃거나 장난치는 일을 자제하게 되었다. 게다가 앞서 첫 번째 글에 썼던 소속팀과의 포지션 갈등을 계기로 더욱 위축되었고 크고작은 부상까지 겹쳐서 오늘 경기에 임하는 시점에도 무릎부상을 안고 있는 상태다.


. 김희진과 같은 팀인 센터 김수지도 지난 두세 시즌 사이에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선수다. 늘 최소한의 자기몫은 해내지만 그 이상에 대한 열망은 잘 보이지 않아서 양효진처럼 게임을 지배하는 센터의 역할보다는 미들블로커로 가끔 이동속공을 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는 ‘얼음공주’같은 이미지였다.


. 말하자면 우리 대표팀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폭우로 물에 푹 젖어있는 장작 같은 상태였다. 자신이 맡은 역할의 ‘한계’를 돌파하기 보다는 그 언저리에 머무르는데 익숙한 상태.


. 여기에서 드디어 최종 보스, ‘김연경’이 등장한다. 사실 김연경의 이야기는 일부러 비중을 줄이고 있었다. 이미 많은 언론매체에서 넘칠만큼 조명을 하고 있고, 또 팀은 어떤 경우에도 한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올림픽에서만큼은 모든 것의 시작점에 김연경이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라바리니가 부싯돌이었다면 김연경은 최고의 불쏘시개라고나 할까?


. GS칼텍스의 차상현 감독에게 누가 물었다. ‘배구인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은 무엇입니까?’ 타노스, 아 죄송.. 차상현 감독은 말했다. ‘열정입니다’ 김연경은 신체조건도 좋고 실력도 좋다. 그러나 세계 배구계를 둘러보면 김연경보다 더 신체조건이 좋고 더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연경보다 더 승리에 대한 열망이 뜨겁고 주변의 선수들을 그 열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선수는 본 적이 없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가장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어느 장작 하나가 나머지 장작들이 다 바짝말라 마침내 불이 붙을 때까지 무작정 타오르는 것이다. 김연경이 바로 그 무지막지하고 확실한 하나의 장작이었다.


. 한일전에서 일본팀과 우리팀의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 팀 코트가 무지하게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시끄러운 사람은 김연경이다. 그는 작전타임 때마다 명언을 남기고 있는데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유명해진 말은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이지만 내가 가장 감탄한 말은 대륙간 예선에서 세계 최강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이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표정이 죽는 중이야, *발, 웃어!!’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다. 아, 웃지 않으면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선수들이 정신을 차릴 수 밖에 없..(아님)


. 이렇게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한 선수들은 점차 자신의 한계를 개방하고 그 벽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갑자기 강한 스파이크를 때리고 엄청난 점프로 다 블로킹해버리고 그럴 수는 없지만 집중력을 최고조로 높여서 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가능하다. 배구는 공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몇 안되는 운동이다. 이런 집중력의 차이는 전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공격이 막히면 다른 선수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공을 올리고 올리고 또 올려서 될 때까지 때리는 말도 안되는 방법이 우리의 ‘작전’이었다. 


. 링크한 사진을 보자. 한일전 5세트 14 대 13으로 일본이 앞서는 상황, 공격 하나만 실수하면 바로 게임이 끝나는 상황에서 심지어 우리팀은 선수교체 미스로 통상 한 명만 들어가는 세터가 안혜진, 염혜선 두 사람이나 들어갔다. 블로킹 높이가 낮기 때문에 박정아가 단 한번의 공격에 성공을 시키지 못하면 다음 번 일본팀의 공격은 막는 것이 불가능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박정아가 스파이크를 때린 직후의 모습이다.


. 일본팀 코트를 보면 긴장하고 당황해서인지 진용이 어수선하다. 특히 아랫쪽 빨간옷의 리베로 옆에 있는 이시카와 마유의 위치선정이 잘못됐다. 만약 김연경이 공격했다면 어깨를 틀어서 어택라인 앞쪽의 빈공간에 꽂아 넣었을텐데 그렇게 코스를 볼 여유가 없었던 박정아는 자신의 특기인 밀어치기로 스파이크를 넣었고 그게 하필 이시카와의 정면으로 갔다.


. 그 순간 이시카와는 무의식중에 오른쪽 어깨를 틀어서 공을 피해버렸다.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절대로 아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각도였기 때문에 실은 바로 옆에 있던 수비전담 리베로에게 공을 미룬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이시카와가 받을 거라고 생각한 공이 통과되어 왔기 때문에 리베로도 이 공을 놓쳐서 우리는 14 대 14의 극적인 동점을 이루게 되었다.


. 반면 우리 팀 코트를 보자. 정말 누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장면이다. 박정아의 공이 블로킹을 맞고 직각으로 떨어질 것을 대비해서 김수지는 무릎을 꿇고 아예 바닥에 엎드려 있고 그 뒤는 오지영, 다시 3선에는 안혜진과 염혜선, 공이 블로킹을 맞고 멀리 튈 것을 대비해서 김연경까지 공격수를 제외한 5명의 선수 전원이 완벽한 부채꼴 모양의 어택 커버 포메이션을 취하고 있다. 이게 바로 집중력의 차이다. 이어진 다음 장면에서 선수들이 모두 바닥을 구르며 기도하고 기뻐하는 장면은 선수들의 긴장과 집중도가 얼마나 초인적인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결국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이시카와는 이어진 공격에서도 베이스라인을 벗어나는 스파이크 실수를 해서 우리나라의 대역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오늘,  그리고 이어질 메달 결정전 경기의 관람 포인트를 이야기해보자. 가장 멋진 장면은 강력한 스파이크가 코트에 꽂히는 순간이 아니라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며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우리 선수들이 자세를 한껏 낮추고 매서운 눈매로 네트 너머를 노려보며 집중하고 있는 장면이다. 하늘로 솟아오른 공만 보지 말고 공이 떠오른 순간 순식간에 정해진 위치로 산개하여 ‘충격에 대비’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셔야 한다. 한 포인트 한 포인트에 인생의 굴곡을 조각처럼 새겨나가는 선수들의 진지한 희노애락을 보셔야 한다. 김연경 선수와 함께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얀 완전연소를 향해 나아가는 선수들의 타오르는 몸짓을 보셔야 한다.


. 자, 이제 문을 열자. 마지막 싸움의 불구덩이로 함께 걸어들어갈 시간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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