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올림픽여자배구 2. 페이스북 곽한영 교수

- 올림픽 여자배구 이야기2 - 폐허를 딛고서


. 김희진 선수 이야기는..... 좀 나중으로 돌리기로 하고(쉭쉭.. 날아오는 돌 피하는 중) 그럼 지금 현재 우리나라 여자배구 대표팀의 상황이 어떤지 잠깐 짚어보기로 하자. 배구경기에는 세터, 레프트, 라이트, 센터, 리베로의 포지션이 존재한다. 어, 다섯 명인데요? 라는 질문이 들리는데 통상 레프트가 2명, 센터가 2명씩 들어가서 로테이션으로 돌아가고 수비에 약한 센터가 후위로 가는 타이밍에 수비 전담요원으로 리베로가 들어간다. 6명 중에 혼자 유니폼 모양이 다른 그 선수다. ‘수비 전담’이기 때문에 규칙상 공격이 금지되어 있어서 혹여 공격을 하면 금방 눈에 띄도록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다.


. 뭐니뭐니해도 현대 배구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세터다. 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투수가 던지는 여러 구질의 공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공은 뭘까? 더스트볼? 빙고... 가 아니고(여기서 웃으시면 연식 인증)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역시 ‘직구’라고 말한다. 타자가 공의 궤적과 속도를 가늠해서 반응을 하기 전에 공이 먼저 들어와버리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배구에서 이런 직구에 해당하는 것이 ‘속공’이다. 네트 앞에서 블로킹을 하는 선수는 세 명, 팔뚝은 여섯 개 밖에 안되는데 블로커가 공에 반응해서 미처 점프를 하기도 전에 공이 내리꽂히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만약 리시브가 안좋거나 이미 수비수들이 공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준비태세를 갖춘 상황이라면 야구로 치면 ‘변화구’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 역시 세터의 역할인데 세터가 네트 너머 수비수들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때로 페이크로 속이며 블로커가 없는 쪽으로 공을 뽑아서 오픈찬스를 내주면 되는 것이다.


.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터들이 몸을 빠르게 움직여서 공의 밑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머리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김호철, 신영철, 이도희, 이효희와 같이 키가 작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토스를 올리는 세터들이 한동안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세터가 키가 작으면 전위에 있을 때 블로킹 높이가 낮아져서 수비에 불리하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 토스 자체의 질도 달라진다. 유명한 배구만화 ‘하이큐’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리시브가 빗나가서 네트 한쪽 구석으로 몰린 볼을 키가 큰 세터가 네트 상단에서 직선으로 반대방향으로 쏘아보낸다면 수비측 블로커들은 멘붕에 빠지게 된다. 공이 좌에서 우로 일자로 횡단하는데 중간에 도대체 누가 이 공을 때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만화같은 상황은 실제 경기에서는 흔히 나오는 것이 아니지만(그렇다고 안나오는 것도 아니다. 대한항공을 이끄는 불세출의 세터 한선수의 토스를 보면 예술이 멀리 있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고난이도 토스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속공조차 키가 크면 공의 전달 거리가 짧아져서 그만큼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다. 반면 키가 작은 세터는 밑에서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공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자세가 금방 읽히고 토스 속도가 느려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 이쯤까지 얘기하면 누구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금방 눈치채셨을 것이다. 한국 여자배구에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처럼 되어가고 있는 이다영 세터는 그래서 이론의 여지없이 다음 세대 한국배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여겨졌다. 키도 크고 유연한데다가 속도도 빠르다. 게다가 공격수를 했던 경험도 있어서 세터인데 종종 스파이크를 하는 ‘세파이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객관적 조건이 다 만들어져 있어도 세터로 성장하는데 가장 힘든 부분인 ‘경험치’ 부분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 소속팀 현대건설에서 넘칠만큼 쌓았다. ‘불행인지’라고 말한 이유는 이도희 감독이 이다영 선수를 줄창 기용하면서 빠르게 성장시킨 것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기간 팀 성적을 말아먹었기 때문에 현대건설 팬들의 입장에서는 애증의 시즌을 몇 년 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정작 그 경험치를 먹고 진정한 주전급 세터가 되었을 때 거액을 받고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것을 보고 현대건설팬들이 뒷목을 잡은 것도 당연. 가장 배신감을 느낀 건 이도희 감독이겠지만)


. 실은 우리나라가 올림픽 예선전을 통과하는데도 이다영, 이재영의 몫이 대단히 컸다. 그렇게 모든 플레이를 이다영을 중심으로 세팅해놓은 상태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터졌으니 대표팀이 초상집이 된 것도 당연. 그래서 급하게 불러올린 세터가 염혜선 선수인데 갑작스러운 콜업이기도 했고 이 선수 역시 지난 시즌 인삼공사를 떠들썩하게 했던 ‘왕따 사건’의 여파로 시즌 후반기를 통으로 날려서 제 컨디션이 아닌 상황이다. 오랫동안 염혜선 선수를 봐온 사람들이라면 이번 올림픽에서 유난히 수척해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아무래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하필이면 같은 팀에 리베로인 오지영 선수가 당시 사건 관련자로 알려져 있어서 어쩌면 서로 좀 불편할 수도 있고..) 현대건설의 김다인 선수도 여러 차례 테스트를 해봤으나 이 선수도 이다영이 갑작스레 흥국으로 이적한 후 갑자기 주전자리를 맡으면서 지난 시즌 저러다 쓰러지지 싶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던 선수에 멘탈도 약한 편이라 토스 자체는 안정적이지만 뒤에 이야기할 라바리니 감독의 공격 전술을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서브가 강한 안혜진 선수가 백업으로 선발됐다. 그런데 안혜진은 ‘돌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활달한 선수이긴 한데 긴장을 하면 순식간에 멘탈이 무너지는 문제도 있다. 심지어 올림픽 예선전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다가 긴장이 너무 심해서 과호흡 증상이 오는 바람에 한 경기도 못뛰고 곧바로 귀국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에서도 사실 가장 서브가 강력한, 강력해야할, 그거 기대하고 데려온 선수인데도 위력적인 모습을 못보이고 있기도 하다.


. 이야기가 길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재 우리 팀은 배의 선장 혹은 조타수라고 할 세터가 대단히 약한 상황이다. 일본과의 경기에서 일본팀 세터의 안정적인 토스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금방 보이실 것이다.


. 그런데 앞서 내가 배구팀의 가장 강한 공격무기가 세터와의 호흡을 통해 이루어지는 속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터가 이렇게 약하니 우리 대표팀에서 김연경 다음으로 많은 득점을 책임져야할 양효진의 공격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직전 올림픽인 리우 올림픽에서 김연경의 득점이 112점, 양효진의 득점이 77점이었다. 이때의 세터가 지금은 은퇴한 마지막 명세터로 불리우는 이효희 선수였다. 그런데 이번 터키전의 경우 김연경 28점, 양효진 11점이었고 일본전에서는 30점/12점이었다. 공격시도는 김연경이 자그마치 64회, 양효진은 22회였다. 이 경기에서 우리 팀 전체 공격시도가 187회였으니까 최소 세 번에 한번은 무조건 김연경에게 토스가 올라갔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지금까지 거의 모든 경기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결국 토스에 자신이 없는 세터가 김연경쪽으로 몰빵을 했다는 뜻이다.


. 쌍둥이 중 다른 한 쪽인 이재영의 공백도 크다. 레프트 포지션은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해야 하는 자리라서 체력부담이 크다. 이재영은 몸이 빠르고 체중을 모두 실어 때리는 공격의 파괴력이 강하며 점프가 대단히 좋아서 백어택, 파이프 공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면서 수비가담능력도 뛰어나다. 오히려 세터인 이다영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김연경의 레프트 자리를 이어받을 차세대 주자였다. 그런데 이 자리 역시 갑작스레 공석이 되면서 박정아가 자리를 메꾸게 되었는데 박정아는 키도 크고 펀치력도 있는 선수지만 체격이 큰 편이라선지 체력이 쉽게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소속팀인 도로공사의 김종민 감독은 수비를 담당해야 하는 레프트 포지션이지만 박정아는 리시브를 빼주고 후위의 단 두 명이 리시브를 담당하는 ‘2인 리시브 체제’라는 특이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박정아는 원래 리시브를 안하던 선수라는 뜻이다. 이번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박정아가 리시브를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은데 오히려 지금 수준이면 기대치보다는 훨씬 잘하고 있는 수준이다. 역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쪽도 문제가 심각하다는거다.


. 예전에 김연경 선수가 팟캐스트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나라 선수 중에 김연경 선수처럼 세계적 레벨로도 손색이 없다 싶은 선수가 누가 있나요?’라고 묻자 솔직한 성격답게 ‘어, 없는데? 효진이? 나랑 친하니까 끼워주고 싶지만 솔직히 쪼금 모자란 거 같고.. 아, 맞아. 해란이 언니는 확실히 세계적 레벨이예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앞서 잠시 소개했던 리베로 포지션의 붙박이 국가대표 김해란 선수를 말하는거였다. 역시 배구를 좀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평가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산 문제로 김해란 선수가 은퇴하면서 리베로 자리까지 공석이 되어버렸다(출산 후 다음 시즌엔 다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인삼공사에서 GS칼텍스로 옮긴 오지영 선수. 오지영 선수도 훌륭한 리베로이긴 하지만 김해란 선수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 많고 특히 지난 시즌부터 체력저하가 두드러져서 리베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순간반응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어려운 공을 여러 개 받아서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텐데 실은 수비전담 포지션인 리베로라면,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수비의 비중을 높일 수 밖에 없는 팀이라면 리베로가 이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


. 라이트 포지션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글의 댓글에서 몇 분이 말씀해주셨는데 우리나라 프로배구에서는 수비부담 없이 공격에 전념할 수 있는 라이트 포지션에 ‘몰빵’을 하기 위해 외국인 선수를 기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국내 선수가 프로리그에서 라이트를 맡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당연히 경험자도, 적임자도 없다. 지난 글 말미에 잠시 언급했던 김희진 선수의 포지션 중복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고 대표팀에서도 라이트 포지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는 편이다. 현재 라이트에는 김희진, 정지윤 선수가 있는데 일본전에서는 8점/0점, 터키전에서는 9점/4점을 기록했다. 공격포인트로만 보면 터키전에서 김희진은 29회 공격시도에 겨우 6점을 벌었다. 주공격포지션이 맞나 싶은 수준이다.


. 지난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에 최고 연봉 계약에 빛나는 이소영도 레프트로 합류했는데 활약이 대단히 저조하다. 일본전 8점, 터키전에서는 겨우 2점 밖에 따지 못했다. ‘국내 최고 연봉 레프트’라는 타이틀이 어색할 정도인데 원래 키가 크지 않다는 한계점도 있지만 이번 대회를 지켜보자니 내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었던 점프메커니즘을 바꾼 것 같다. 인삼공사로 이적하면서 이영택 감독이 ‘더 강한 서브를 위해 자세를 바꾸라고 하겠다’고 말했는데 서브는 오히려 더 약해진 것 같고 전에 말했던 부상 위험 때문에 두 발을 동시에 띄우는 서전트점프로 바꾼 듯한데 이 때문에 점프 높이가 낮아져서 안그래도 낮은 키에 더욱 한계가 드러나는 상황이 된 듯 하다.


. 자, 감상이 어떠신가. 이 글의 제목이었던 ‘폐허’라는 말이 실감나시는지? 이 막막한 상황에 대한 상당부분의 책임은 역시 핵심 주전이었던 쌍둥이에게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일들만이 겹겹이 쌓인 상황이다. 당연히 이번 올림픽은 정말 올림픽 정신으로,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으로 마음을 내려놓은 배구팬들이 많았다.


. 하지만 바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열악한 상황’에서 지금의 시점에까지 올라왔다는 점이 진정으로 가슴떨리게 대단한 부분이다. 우연도 있고 행운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있는 성취는 단순한 운만으로 결실이 맺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거스르는 ‘그럼에도 폐허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기적처럼 작동했다. 그 힘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라바리니, 그리고 김희진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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