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조선을 떠나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일본인들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



일본인 촌: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조선인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 원산의 일본인촌의 모습. 철길 너머로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보인다.


이러한 일본인촌에는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의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고, 경찰, 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평소 조선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증언: 여기 일본 아니었어?

당시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이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 일제시대의 소학교 교실


“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 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일본인들이 느낀 패전 후 몇 달간의 변화

1945년 8월 16일: 독립만세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9월 5일: 조선에 남고 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 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미래가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가을: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 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 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 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겨울: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다.



내용 발췌 출처



위의 이야기는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2, 3세들이 자신이 태어난 조선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끼리 고립된 환경에서 살아왔오다가 패전이 되자 조선인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지도 몰랐으며 왜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역사에 무지했던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면이지요.


이들은 패전후 본국인 일본에서 돌아가서도 식민조선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다가 거지꼴로 되돌아 왔다고 '히키아게샤'라고 불리며 온갖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를 빠져 나오면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현금액(천엔상당)과 화물(개인이 휴대할 수있을 만큼만)도 제한받아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사람들이라서 일본의 친척집에서 군식구 취급을 받으며 눈치보면서 살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친척들로부터도 절연당한 사람들은 '임시' 수용소에서 거처하게 되지만 '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점점 수용소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절도, 강도, 강간등 각종 범죄와 위생문제등 '히키아게샤'는 그 자체로 전후 일본의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나마 당시 그들이 간신히 가지고 나왔던 현금과 화물조차도  당시 한국 정부는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조선으로부터 착취한 것이니까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라는 입장이어서 양자간의 입장차이도 상당히 컸던 상황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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