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을 읽을 거다. 표지에는 유숙자 옮김 이라고 적혀 있다. 옮긴다니. 재밌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역자인 유숙자가 무거운 철근이나 시멘트를 나르듯 낑낑대며 크고 무거운 소설을 옮기는 상상을 한다. 일본어 위에 놓여 있던 소설을 한국어 위에. 팔뚝에 돋는 핏줄. 역자의 또 다른 자아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안전모를 쓰고 또 다른 자신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자자, 유 씨. 좀 더 힘을 냅시다.


나는 번역이라는 것이 일종의 연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번역가는 거칠게 이분하자면 원서를 최대한 살리는 사람과 출간 국가의 문화적 실정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의역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예전에는 전자가 가장 이상적인 번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번역이 연주라고 생각하면 역자 나름의 해석을 따라 번역서를 읽는 것도 즐거운 독서 체험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할 만한 역자라는 전제하에.

생각해보자. 쇼팽의 같은 곡을 루빈스타인, 글렌 굴드, 조성진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다는 건 각자 다른 해석의 쇼팽이지, 피아노 좀 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쇼팽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번역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숙자가 자신의 모국어이자 한국어로 연주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앞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얼마나 거듭 번역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는 같은 작품의 여러 다양한 번역본을 통해 원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무조건 원서 그대로만 고집하고 싶다면, 차라리 번역본에 기대지 않고 그 나라 언어를 직접 공부해서 정말로 원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번역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개정되어야 한다. 독자 또한 시간과 의욕이 허락한다면 개정된 번역본을 재독해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옛날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힘들었다. 믿을 만한 출판사였는데도 그랬다. 바뀐 시대 탓도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오래전 랭보의 시집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하필 엉터리 번역본으로 읽었다가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건 사실 랭보의 문제라기보다는, 명백히 역자의 문제였던 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이기도 했고. 번역서를 읽을 때에는 신뢰할만 한 출판사와 역자인지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체력과 시간은 소중하니까.

고작 체르니 100번을 겨우 뗀 듯한 연주자가 쇼팽을 연주해서 내놓는 불상사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다. 연주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티켓을 사서 객석에 앉은 사람은 무슨 죄겠나. 어리석은 관객이 오판하여 연주자가 아닌, 곡에 불만을 품는다면 쇼팽은 또 무슨 죄겠는가.


덧붙여 시와 소설의 번역본인 경우,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 시인이 번역한 시는 또 특별한 맛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라든지,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김연수가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 시인 김정환이 번역한 셰이머스 히니의 시전집,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김혜순이 참여한(아마 윤문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은)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 같은 것들. 이런 작업들은 정말로 연주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Follow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