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오늘은 우산을 쓰고 점심을 먹으러 가며 생각했다. 올해는 비만 오는구나. 이쯤 되면 레이니 데이가 아니라 레이니 이어(이얼?)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퇴근이 세 시간 반 남짓 남았군. 연말을 앞두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업무량 속 이 태풍의 눈 같은 시간.


앞 문장까지 쓰고 다시 글을 쓰려고 보니 이젠 퇴근 시간이 두 시간 반 남짓 남았군. 이왕 이럴 거 오전부터 한 시간마다 한 문장씩 적어볼 걸 그랬나. 만약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한 문장씩 적는다면 그 글은 혼자 쓴 게 아니라 열 명의 내가 공동으로 쓴 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공저 나 1, 나 2, 나 3…….” 물론 시간을 아주 미세하게 쪼갠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나는 무수한 겹의 내가 바통을 이어가며 글을 쓰는 거겠지만. 그러니까 어떤 와인은 마시는 와중에도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해 수시로 맛과 향이 변하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인 이십대 초반에, 글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뭔가를 끼적여 놓은 것들을 본 적이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녹음해서 들으면 대부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듯이 그 역시, 아니 그 이상으로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는 이제 ‘나’가 아니면서 여전히 ‘나’이므로. 지금 쓰는 글들도 훗날 보면 그런 느낌일까. 그런데 두 가지 경우 모두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내가 쓴 글을 볼 때 다시 얼굴이 화끈거린다면 한 번 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고통일 테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다지 성장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또 장점이다. 수치스럽다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 것이고, 수치스럽지 않다면 나보다 어린 내가 철모르던 시절에 크게 삽질(?)한 것은 아닐 테니까.


수치스럽다면 몇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나보다 훨씬 어린 나를 연민하는 기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기분으로. 수치스럽지 않다면 나는 어린 나를 여전히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기분으로.


개인적으로는 사실 올해 쓴 일기들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전부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적게든 많게든 각자의 사진첩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텐데, 나는 내 사진첩을 보면 잘 나온 사진들만 남기고 모조리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도 들고, 그렇다고 못 나온 사진들을 다 버리자니 그냥 그 시간들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한다.


카프카는 죽을 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그 유언을 어기고, 카프카의 원고를 세상에 내놓았다. 카프카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의 전설적인 원고들을 경험하지 못했겠지만, 과연 저 사후세계에서 당사자인 카프카가 이 현장을 모두 목격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막스 브로트 너 이 새끼……, 정도? 아, 물론 독일어로 욕했겠지만, 사실 그의 성정으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그러나 사후이기는 하지만 유명세와 명예 상관없이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그의 작품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할 수 있기에 그는 카프카다.


시간이 많이 흐른다면 그때도 내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치스럽든 그렇지 않든, 어린 나를 조금은 너그럽게 봐주고 싶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기도 가장 늙은 사람이기도 하니까. 내게 어린 시절의 내가 깃들어 있듯, 아직 도래하지 않는 내가 이미 내게 깃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자, 이제 퇴근이 한 시간 반 남짓 남았다.


오늘의 일기는 두 시간 전의 나와 한 시간 전의 나와 현 시각의 ‘나’가 함께 썼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겹의 나는 세 명의 나를 보조한 서브 작가 정도로 해두자.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