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참조 1)의 간지 넘치는 인물은 나비울리나(Эльвира Сахипзадовна Набиуллина)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님이시다. 러시아 수뇌부에서 아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있는데, 그녀는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푸틴에게 사임을 요청했었다. 푸틴은 사직서를 반려했고 말이다(참조 2).
전쟁 경제를 푸틴 대통령이 그녀에게 오로지 일임했다는 얘기이고,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루블 환율을 지켜내고 오히려 절상까지 시키는데 성공했다(참조 3). 실제로 러시아 루블 가치 상승은 고립되어가는 러시아 경제에 그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수입 가격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스와 원유 가격 인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도대체 미국과 EU는 무엇을 위해 제재했을까?
옥스퍼드 대학교의 인정연구소(Recognised independent centre, 독립법인이며 대학측과는 ‘특별한 관계’이다, 참조 4) 중 하나인 Oxford Institute for Energy Studies에서 재미나는 보고서를 하나 냈다(참조 5). 러시아는 현재 가스 대금을 “루블”로 지불하라 요구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은 이를 마뜩잖게 여기고 있다. 핀란드는 루블 결제를 거절하다가 가스 공급도 5.21(토) 부로 끊겼고 말이다.
자세히 알아봅시다. 가즈프롬 뱅크는 미국과 EU의 제재 대상이 아니며, 제재 대상이 된 것은 러시아의 주요 은행 및 중앙은행과의 거래(즉, 자산을 몰수한 개념이 아니다)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유럽 국가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다? 루블 결제를 요구했습니다. 왜냐? 제재 때문에 유로를 받는다고 해도, 중앙은행 거래가 막혔으니 환전이 안된다. 그래서?
가즈프롬 뱅크에 루블 계좌와 유로(혹은 달러) 계좌를 동시에 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각 유럽 국가들이 가즈프롬 뱅크의 유로 계좌에 유로를 집어 넣으면? 가즈프롬 뱅크가 계좌 안의 유로를 루블로 환전한다. 중앙은행이 막혔는데 어디에서? 모스크바 외환 거래소 혹은 동 은행이 가스 수입국 기업에게 유로화 담보 신용을 제공하여 루블화를 차입한다.
즉, 가즈프롬 뱅크 안의 루블 계좌에, 가스프롬 뱅크가 유로 계좌의 대금을 루블화 시켜서 집어 넣는다. 그러면 거래 끝. 이제 러시아 정부(가즈프롬)에 가스 대금을 이체시키면 완전히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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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의 거래가 혹시 제재 위반인가요? 아닙니다. 환전과 이체 과정에 있어서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하지 않고 48 시간 내로 환전하도록 규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참조 6). 그런데 말입니다? 가즈프롬 뱅크가 이용하는 외환 거래소는 러시아 중앙은행 통제 하에 있고, 가즈프롬 뱅크가 러시아 중앙은행으로부터 유로화를 담보로 루블을 차입하기 때문이다.
즉, 간접적으로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고 볼 측면이 있다. 환전과 이체가 러시아 통제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EU(정확히는 EC)는 여기에 확실한 의견을 내지 않고 있다. 아마 내부적으로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있을 듯. 그렇다면 루블화 결제를 거부한 폴란드와 불가리아, 핀란드만 바보일까? 모르겠다.
그리고 그 틈에 러시아는 환율을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더 안정시켰고, 흑자가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는 상황인데 제재가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비울리나 총재 스스로가 성장률 회복이 2024년에나 가능하다 했고(참조 1), 러시아 여러 산업의 수입 의존도가 높음을 계속 경고하고 있는 것은, 그녀 스스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를 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과연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답 없는 고민이 계속 될 수밖에 없을 일이다. 은행 제재 때문에, 루블 결제 요구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가스 값이 상승하여 러시아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더욱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확실한 것은 FT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금융무기(참조 7)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다는 점 정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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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사진 출처, Le siège de la Russie provoque l'envolée du rouble(2022년 5월 23일): https://www.lesechos.fr/finance-marches/marches-financiers/le-rouble-la-devise-forte-dune-russie-assiegee-1408839
2. Putinin kerrotaan hylänneen Venäjän keskuspankin johtajan eronpyynnön – nyt Elvira Nabiullina jatkanee vastentahtoisesti virassaan(2022년 3월 23일): https://yle.fi/uutiset/3-12373263
3. 루블 환율의 안정(2022년 3월 22일): https://www.vingle.net/posts/4332853
4. 사실 2022년 5월부로 사라질 것으로 보이는 개념이기도 하다. 다만 후속 체계가 어떨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5. Rouble gas payment mechanism: implications for gas supply contracts(2022년 4월) : https://www.oxfordenergy.org/publications/rouble-gas-payment-mechanism-implications-for-gas-supply-contracts/
6. 시간이 왜 중요하냐면, 환전 시간이 지체될 경우, EU 내 기업들이 가즈프롬에게 유로화 대출을 해 준 것과 동일한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48시간 내로 줄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배제된다.
7. Weaponisation of finance: how the west unleashed ‘shock and awe’ on Russia(2022년 4월 6일): https://www.ft.com/content/5b397d6b-bde4-4a8c-b9a4-080485d6c6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