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일본:DAY 9] 나라-시모노세키. 여행에 필요한 건 강인한 엉덩이, 저 너머엔 부산이 있을 텐데

여행은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라에서 시모노세키까지 13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면서 새로 깨달은 게 있다. 기차여행에는 강인한 엉덩이가 필수라는 걸. 아침 7시 40분 나라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서일본으로 향했다. 약 560km. 신칸센이라면 4시간에 갈 거리를 로컬선을 타고 13시간에 걸려 횡단하는 일정이다. 히메지와 오카야마, 히로시마를 거쳐 세토내해 해안을 달리는 산요혼센은 이른 시간부터 산만한 배낭을 멘 여행자들과 오사카의 근무지로 향하는 회사원들로 가득했다. 장거리 열차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리를 선점하는 눈치다. 자칫 잘못하면 다음 환승역까지 4시간 이상을 서서 가야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늘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사진을 찍지만, 장거리를 갈 때 만큼은 어느 탑승구로 승객들이 몰리는 지를 파악하는 눈치와 재빠른 움직임이 우선이다. 좌석도 자칫 잘못해 역방향이나 통로 쪽에 앉는다면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차창 밖 풍경을 놓치게 된다. 위기는 오카야마역에서 환승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날쌔게 자리를 차지하고 눈을 좀 붙여볼까 했더니 아이를 업은 여성이 근처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얼굴에 철판을 두를 수는 없는 상황. 솔직히 정말로 양보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인간의 도리는 지켜야 했다. "여기 앉으세..."라며 말문과 엉덩이를 함께 떼는 순간.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무릎을 맞대고 앉아있는 어린 학생과 나이 지긋한 어른이 같이 일어섰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머쓱한, 조금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업은 여성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리는 합의를 봤다. 어르신은 앉으세요. 어머니도 사양하지 마시고. 형씨. 우리는 서로 번갈아서 앉자구. 피곤하면 팔걸이에 좀 걸쳐 앉아도 되고. 그렇게 네 명이 앉는 자리에 여섯 명이 뒤엉켰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리 없는 기차는 계속 달려갔다. 세토대교가 다가올 무렵, 차장은 멋들어진 목소리로 차내 방송을 했다. "승객 여러분.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차창 밖을 봐 주세요. 혼슈와 시코쿠를 잇는 세토대교입니다. 열차는 잠시 속도를 줄이겠습니다. 부디 천천히 이 풍경을 즐겨주시기를..." 아. 바로 이거였다. 시속 300km의 신칸센을 타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경험. 조금 느리게 가야만 볼 수 있는 풍경. 반짝이는 바다는 오랫동안 눈가에 머물러 주었다. 행복했다. 그래도 엉덩이는 계속 아팠다. 다음 환승역인 무인역. 이토자키역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다음 열차는 30분 뒤였다. 플랫폼 위 흡연구역으로 달려가 담배를 몰아피우고 역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송어 누름초밥과 중화냉면, 녹차를 샀다. 역에 돌아오니 벤치에 자리가 없었다. 배낭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식탁 삼아 허겁지겁 음식을 삼켰다. 기차여행자들 사이에선 부끄러울 게 없었다. 스물을 갓 넘긴 듯한 여자 배낭여행객들도 선 채로 샌드위치며 오니기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기차는 히로시마를 지났다. 작년 여행에선 하루를 보냈던 곳이다. 거리를 씩씩하게 달리던 히로덴은 잘 있을까. 원폭돔에는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지. 평화공원의 고양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카프소스를 뿌린 오코노미야키는 정말 끝내줬는데... 가끔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책을 읽기도 했다. 모두 지겨워지면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몽상에 잠겼다. 해가 뉘엿뉘엿 땅 끝 너머로 모습을 감출 때, 석양에 물든 풀밭이 지난한 여행길을 버텨낼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이미 저버린 해처럼, 이 길도 언젠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막다른 곳에 다다를거야. 때론 너무도 힘들지만, 어쩌면 달리고 있다는 자체가 사실 굉장한 일은 아닐까. 달리고 있는 한 닿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밤 8시. 산요혼센은 종점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다 냄새가 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혼슈의 끝자락이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호텔에 짐을 맡긴 뒤 자전거를 빌려 거리를 달렸다. 시모노세키의 랜드마크인 카이쿄유메타워에 올랐다. 높이 153m의 이 타워 최상층에 오르면 시모노세키는 물론, 바다 건너 기타큐슈의 야경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만월의 달이 바다를 비췄다.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문득 떠올렸다. 아. 저 너머에 부산이 있을텐데. 더 멀리 가면 칭다오가 나오겠지. 그리고 그 저편에는... 자전거를 타고 밤 늦게까지 시내를 달렸다. 전날까지 있던 간사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야자나무가 길가에 서 있었다. 맨홀 뚜껑에 그려진 복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상점가인 그린몰 초입에 있는 조형물인 '부산문'은 시모노세키와 부산의 자매도시 체결을 기념해 세워졌다. 향수병까진 아니어도, 떠나온 내 나라가 그리워져 한참을 그곳에서 맴돌았다. 시모노세키 국제터미널 인근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카메라 조도를 끝까지 올려 사진을 찍었다. 정박한 배들은 내일이면 부산, 칭다오, 히로시마, 러시아, 각자의 항로를 따라 떠나겠지. 호텔로 돌아오는 데 길을 잘못 들어 홍등가를 지나쳤다. "형님, 한 번 들러보세요!" 휴. 역시 다르긴 다르다. 하루종일 열차를 탄 덕분에 이날은 9645보를 걷는 데 그쳤다.

From Tokyo t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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