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일본:DAY 12] 돗토리-도쿄. 여행의 끝, 비로소 이곳을 집이라 부르게 된 날

새벽 공기를 뚫고 돗토리역 홈으로 들어오는 오전 5시28분발 하마자카행 산인혼센 열차에 올랐다. 전날 하루종일 열차를 타고 넷카페에서 쪽잠을 잔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정신은 비몽사몽. 벽에 머리만 기대도 잠이 쏟아졌다. 장거리 기차여행의 로망마저 사라졌다. 한 번의 환승만 삐끗해도 오늘밤 도쿄에 돌아가지 못한다. 밀려오는 불안감. 떨쳐내기 힘든 졸음. 이제는 좀 쉬게 해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몸. 그래도 열차는 달렸다. 1분이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여행자 따윈 아랑곳 않고, 언제나처럼 느린 속도로. 확 다 포기하고 교토에서 신칸센에 오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 지 모른다. 오전 11시 12분. 교토부 소노베역에 도착했다. 휴대전화 알람을 맞춰두지 않았다면, 아마 역무원이 어깨를 흔들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 사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세 번 열차를 갈아탔다. 소노베역은 시모노세키~교토를 잇는 일본 최장 산인혼센의 종착지다. 이틀에 걸친 산인혼센 완주. 거기에 뚜렷한 달성감은 없었다. 그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 뿐. 제대로 차창 밖을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잠시 스쳐간 기노사키온천의 풍광은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였지만, 수 분도 되지 않아 눈을 감아야했다. 지쳐있었다. 소노베역에서 환승해 교토역으로 향했다. 5일 만에 교토에 돌아왔다. 감상에 빠질 틈은 없었다. 33번 플랫폼에서 2번 플랫폼까지 9분만에 이동해야 한다. 무거운 짐과 몸을 질질 끌고 달렸다. 열차에 올라 숨을 고른 뒤, 멀어지는 교토를 미처 바라보지도 못한 채 다시 잠에 빠졌다.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노선은 이제 끝났다. 도야마를 떠나 서일본으로 향할 때 잠시 지나쳤던 시가현을 뚫고 나고야를 거쳐 도쿄로 향하는 토카이도혼센을 타야 할 때다. 오오가키역에서 이날 7번째의 환승을 했다. 자리에 앉아 다시 눈을 붙이려고 할 때, 옆자리에 남자 꼬마아이가 앉았다. 검은 테 안경을 쓴 똘망똘망해 보이는 녀석. 초등학교 1~2학년이나 되었을까. 다른 가족들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마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때, 아이의 한 마디는 뒷통수를 때리는 듯 했다. “곤니치와.” 아이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응당 내가 먼저 건넸어야 할 말 아닌가. “응. 곤니치와. 어디까지 가니?” “나고야요. 어디까지 가세요?” “도쿄.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야.” “으에~ 진짜요? 도쿄까지? 이거 타면 갈 수 있어요?” 아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응. 열차를 계속 갈아타면 도쿄 뿐 아니라 홋카이도에도 갈 수 있는 걸.” “굉장해!”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이는 사려깊었다. 재잘재잘 떠들지도, 질문을 쏟아내지도 않았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포테이토칩을 꺼내더니, 슬쩍 눈치를 살폈다. “과자 드실래요?” “괜찮아. 고마워.” 아이는 비로소 안심한 듯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아이의 가족들에게 행여 오해를 살까 걱정됐다. 잇단 장거리 이동으로 행색 또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남의 집 아이 머리 한 번 쓰다듬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아아. 그렇다 해도 좀 더 다정하게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좋았을텐데. 여행 중 찍은 사진이나 스탬프를 보여 주어도 기뻐했을텐데. 여행가방 깊숙한 곳에 묻혀있는 기념품이라도 하나 꺼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지친 몸과 마음이 도저히 생각을 따라가질 못했다. 버티려고 해도 계속 눈이 감겨왔다. 아이는 말수가 적은 여행자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게임기를 꺼냈다.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이어폰을 끼고. 나는 다시 잠들어버렸다.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아이였다. 차창 밖을 보니 어느새 열차는 나고야에 닿아있었다. “저 여기서 내려요.” “그래. 말 걸어줘서 고마워.” “히히.” “사요나라.” “사요나라.” 가슴이 욱씬거렸다. 일기일회. 다신 만나지 못할 텐데. 이제와서 얘기지만, 이처럼 살가운 아이를 키운 부모라면 머리 한 번 쓰다듬는 것쯤은 문제 삼지 않았을거란 생각도 든다. 이방인은 때론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다. 잠시 상상을 했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서 홀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그 때 나를 떠올려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열차는 태평양을 옆구리에 낀 채 계속 달렸다. 하마마츠를 지나고, 시즈오카를 거쳐 아타미로. 조금씩 도쿄가 가까워져 간다. 차창 밖에 후지산이 비춰지길 기대했지만, 날은 흐렸고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오다와라를 지나 에비스역. 도쿄다.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좀 쉬어도 된다. 에비스역에서 나와 가든플레이스 근처 흡연소에서 담배를 피웠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세련된 펍에서 맥주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쩐지 시선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발 끝을 내려다보곤 창피해졌다. 구겨진 티셔츠. 헝클어진 머리 위에 걸친 야구모자. 페트병을 끼워넣은 반바지에 어느새 헤진 운동화. 빨리 돌아가자. 야마노테센 다카다노바바역. 학기 중 매일같이 오고 가던 이 역이 어찌나 이리 반가운지. 세이부신주쿠선으로의 환승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 돌아왔구나. 조금씩 실감이 났다. 기운을 차렸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그리고 8월 15일 저녁 10시.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역 도착. 세이부신주쿠~혼카와고에를 잇는 특급 레드애로우에서 내려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순간 느꼈던 감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40시간에 걸친 기차 여행의 종착역. 내가 사는 마을.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진 여정. 일본으로 떠나온 뒤에도 집은 늘 서울이었다. 도쿄는 잠시 머무르는 곳이란 생각이 강했다. 급할 것은 없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돌아가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역에서 나와 어둑한 밤길을 걸었다. 역에서 집까지는 불과 1분 거리. 늘 급하게 지나간 그 1분을 찬찬히 걸었다. 겨우 12일이 지났을 뿐인데, 이토록 새롭고 반갑다니.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내 작은 방문을 열었다. “다다이마.” 짧은 읊조림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어쩐지,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몸이 된 듯 했던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병 채로 몇 모금을 마셨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완연히 혼자였다. 외롭지는 않았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외톨이 여행자를 응원해 준 그들에게 목소리가, 적어도 이 마음이라도 닿을까. "저 도쿄로 돌아왔어요." 조금 눈물이 났다. 집이구나. + 8월 4일부터 15일까지 총 12일. 제 지루하고 난삽한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댓글을 남겨주셔서 여행 중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마친 뒤, 다음달에는 다시 열차를 타고(!) 토호쿠를 지나 홋카이도를 향해 떠납니다. 그 사이엔 이번 여행의 기록을 정리하고, 다음 여행의 준비 상황도 적어둘 계획입니다. 응원해 주신다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From Tokyo t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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