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형 타격기계, 김현수의 무한도전

6년 전, 베이징 올림픽 풀리그 일본과의 맞대결. 9회초 2사 1, 2루에서 당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경문 감독은 우타자가 아닌 좌타자 카드를 꺼내든다. 대개 좌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서면 우타자로 대타 작전을 펼치기 마련인데 대표팀의 히든카드처럼 꽁꽁 베일에 쌓였던 떠오르는 샛별, '타격기계'의 등장을 알린 좌타자 김현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 팬들은 당연히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과감한 작전을 펼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고 모 아니면 도, 도박성이 너무나 큰 시도였다. 그러나 보기좋게 김현수는 투수 옆을 지나가고 중전 안타를 터뜨리며 김 감독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이 경기 이후 김현수는 대회가 끝날 때까지 3번 타순에 배치되면서 대표팀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27타수 10안타, 타율 .370을 기록해 차세대 국민타자로 떠올랐다. ​ 여기서 김현수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 해 시즌 타율 .357, 이듬해에는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역시나 3번 타순으로 출장하면서 28타수 11안타 타율 .393이라는 놀라운 타격감을 과시했다. 2010년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선 2년 전 베이징의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18타수 10안타 5할5푼5리의 타율로 함께 뛰었던 추신수, 김태균, 이대호 등을 능가하기에 충분했다. ​ 지난해 제 3회 WBC에서 타율 .250, 다소 부진했지만 출전한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부진했다. 본인 때문에 예선에서 탈락한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조별예선 탈락에 아쉬움을 드러냈던 이가 김현수이다. 팬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장면은 네덜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멋진 홈송구로 주자를 잡아내는 보살. 타격에 비해 수비력이 뒤쳐진다는 일각의 평가를 비웃듯 수준급의 스로잉 능력을 자랑했다. ​ 2008년, 2009년, 2010년, 2013년 총 네 번의 국제대회를 경험한 김현수는 조금은 특이한 사항을 지니고 있는데 이번 AG에 출전하는 야수진 가운데서 국제대회 경험이 가장 많다. 다시 말해서 88년생, 2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대표팀 야수진에서는 베테랑 소리를 듣는 셈이다. 본인도, 심지어 팬들도 간과하고 있던 사실에 듣고 놀라는 팬들이 적잖다. ​ 김현수, 2006년 신고선수 자격으로 두산에 입단했다. 신고선수는 일반 계약선수들과는 달리 팀이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방출시킬 수 있는 야구계의 비정규직과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프로의 부름을 받기 위해서라면 이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들이 많다. 국가대표에서도 기대주라는 소리를 듣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이 있었던 김현수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 현대에서 이별 통보를 받은 이종욱(現 NC)과 함께 장종훈 이후 '연습생 신화', 혹은 '신고선수 신화'라고 불리는 이슈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 200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일본 전지훈련에서 연습경기에 출장한 좌익수 김현수, 상대팀 타자의 타구를 발빠르게 쫓아갔고 펜스와 충돌하면서 기어코 타구를 잡아냈다. 타구는 생각보다 멀리 뻗어나갔고 지켜보던 김경문 감독(당시 두산, 現 NC 감독)도 생각했던 거리보다 더 멀리 뻗어나가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도 타구의 종착지는 김현수의 글러브였는데 포구 과정에서 부상이 의심될 정도로 펜스에 쾅 부딪혀 현장 관계자들은 김현수의 몸상태를 가장 먼저 체크했다. ​ 그런 관계자들의 우려를 모른 척하고 김현수는 충돌 뒤 곧바로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김경문 감독은 그 자리에서 코칭스태프에게 "올시즌 (김)현수는 무조건 주전이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실제로 전지훈련에서 돌아와 2007년 99경기에나 출장해 김경문 감독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야구계 관계자들, 두산팬들은 들어보지 않았던 이름에 환영보다는 아직 낯설음이 앞섰다. ​ 한 관계자는 이렇게까지 얘기를 했다. ​"프로 무대 경험이 전무한 선수를, 그것도 수비 범위가 넓은 외야수를 주전으로 바로 내보내는 건 초보 감독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두산을 누구보다 잘 알고 팀이 우승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선택에 결코 좋은 결과를 확신하기 어렵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 그렇다. 김현수는 경험이 없었다. 2할7푼3리, 생각보다 낮은 타율은 아니었지만 임팩트를 쏟아붓기엔 아직 부족함이 곳곳에 존재했다.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없이 팀의 준우승에만 만족을 해야 했다. 이상하게도, 김현수는 이 때부터 'PS 트라우마'에 걸렸고 부진을 면치 못하는 모습에 여러 팬들이 실망했고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답답함을 가장 많이 느꼈던 김현수도 원인 모를 부진에 눈물만 지었다. ​ 그렇게 잘 나가던 2008년에도 김현수는 포스트시즌에서 침묵했다. 올림픽 타율 .370, 시즌타율 .357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지만 가을야구가 시작되자 약속이나 한 것같이 배트가 조용했다. 본인이 가장 잊고 싶은 2008년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선 1사 만루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상대 투수 채병용 정면으로 그대로 땅볼 타구가 굴러가 1-2-3 병살타로 가을야구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마침표가 느낌표로 바뀌지 못한 아쉬움, 공 하나로 팀의 희비가 엇갈리자 김현수는 1루 베이스 근처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 아직도 많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김현수의 눈물, 팀이 가을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2011년을 제외한 나머지 네 번의 가을야구를 돌아봐도 눈물이 완전하게 닦이질 않았다. 그나마 지난해 준PO 3차전 9회말에 터진 2루타를 기점으로 누명에서 벗어난 게 위안거리. 1차전에는 삼성 선발 윤성환에게 개인 통산 PS 첫 홈런을 쏘아올리며 팀 승리에 견인했다.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우승의 문턱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분명 크나큰 약이 되었다. ​ 김현수는 2008년과 2009년 완전한 컨택형 타자로 고타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2010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갑작스레(?) 슬러거 변신을 선언하면서 홈런 개수 증가에 초점을 맞췄다. 2009년 23개의 홈런으로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시즌을 보냈는데도 좌타 거포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염두하고 있었던 그이다.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보냈지만 시행착오도 겪어봐야 한다는 타격기계의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홈런 개수는 전년도에 비해 딱 한 개 증가했고 타율은 .317까지 추락했다. 무려 4푼이나 떨어진 타율이었다. 전반적으로 스윙에 힘이 실리긴 했으나 김현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교한 컨택능력이 사라졌다. 토종 타자 5명이 각각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것은 이 당시 두산이 최초였다는 점은 의의를 둘 수 있겠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물론 시즌 이후 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맹활약으로 부진을 떨쳐냈지만 슬러거 변신 실패로 마음고생을 겪었고 2011년 타율 .301, 2012년에는 .291까지 떨어지면서 100경기 이상을 소화한 2008년 이래로 가장 낮은 타율이었다. '3할도 치지 못하는 쓰레기', 이하 '삼못쓰'라는 웃지 못할 꼬리표가 그를 괴롭혔다. 어떻게 보면 이듬해 WBC에서의 부진도 전년도 부진이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 점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왔다. ​ 2013년, 다행히도 타율은 .302로 시즌 3할대 타율을 다시 기록하는가 하면 홈런 개수도 16개로 2010년 24개 이후 가장 많았다. 이윽고 올시즌, 예전의 타격기계가 다시 돌아왔다. 타율은 .325, 홈런은 16개. 2년 연속 90타점에도 청신호가 켜졌다.(AG 브레이크 전까지 타점 82개) 최형우(삼성) 등 쟁쟁한 경쟁자들의 빼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류중일 감독은 여전히 김현수에게 신뢰를 보냈다. 시즌 타율보다도 대표팀 경험이 크게 좌지우지했다. ​ 2009년 WBC까지만 해도 김현수가 대표팀에서 맡은 역할은 3번 타자였지만 2010 광저우 AG부터 변화가 생겼다. 추신수, 이대호, 김태균 세 명의 중장거리형 타자들이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든든한 클린업 맨 역할을 맡자 원래 3번 타순을 맡던 김현수가 6번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소속팀 두산에서 3번으로 고정된 타순에 배치되고 올시즌같은 경우 칸투가 빠졌을 때 4번 타순을 임시적으로 맡긴 했지만 6번 타순 배치는 거의 없었다. ​ 김현수의 타격능력이 뒤쳐져서 6번 타순으로 내려간 게 아니다. 이번에는 나성범, 박병호, 강정호 세 선수가 클린업 맨을 꾸리게 됐는데 나성범이 올시즌 김현수보다 대체적으로 타격감이나 장타력이 좋아 3번 타순에 낙점을 받았다. 김현수도 나성범의 능력을 인정했고 이제는 덤덤하다는 듯 본인의 자리와 상관없이 활약을 예고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원래 3번 타순을 맡다가 6번에 배치됐으나 클린업 맨이 세 명이 아닌 네 명으로 구성이 된다고 봐도 무관하다.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아직 김현수는 27세, 서른을 넘기지도 않은 나이에도 국가대표에 없어선 안 될 선수이다. 한 방송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 가장 기대되는 스포츠스타'에서도 타 종목 선수들을 제치고 10위에 오를 정도로 야구팬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라 많은 관중, 다른 국제 대회들을 다 겪어봤지만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 참여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관전포인트이다. ​ 올시즌 문학에선 29타수 8안타 타율 .276, 무홈런으로 조금은 좋지 않았다. 문학구장 타율 4할이 넘는 박병호와는 대조적이지만 딱히 구장과의 인연이 있다고 해서 국제대회까지 그 데이터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어쨌든 단기전인 만큼 집중력이 요구되는 시기이고 나성범, 강정호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 어느 국가가 되었든 상대 마운드가 고의4구 작전을 펼치게 될 상황도 상상해본다면 본인의 장점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AG, 여러모로 타격기계의 진화가 기대된다. ​ 국대형 타격기계, 김현수의 무한도전은 인천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 [글 = 뚝심의 The Time(blog.naver.com/dbwnstkd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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