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홋카이도:DAY 6] 오타루-아사히카와, 눈 덮인 산에서 조난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다

새벽 6시 오타루에서 아사히카와로 향하는 첫 열차를 탔다. 새벽 4시부터 장사를 시작, 일본에서 가장 빨리 문을 여는 오타루 어시장에서 초밥을 먹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다. 기차는 새벽 공기를 가르고 오타루역을 벗어났다. 다음 역인 오타루칫코역에서부터는 환상적인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의 절반을 가르는 하코다테본선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경치를 즐기며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사히카와역에 도착해 있었다. 홋카이도의 허브 역할을 하는 역이다. 자연이 가득한 후라노와 비에이에 갈 때도 이 역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 역에 온 것은 홋카이도의 최고봉, 다이세츠산(大雪山)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아사히카와에서 다이세츠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아사히다케 로프웨이 인근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안타깝게도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 언저리에 도착할 때까지는 날씨가 개이길 바랐지만 점차 먹구름이 짙어져 갔다. 또 잠시 잠이 들었다 깼더니 사람들이 버스에서 우루루 내리고 있었다. 아차 싶어 버스에서 뛰어내렸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로프웨이 승차장은 보이지 않았다. 등산복 차림의 백인 남자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함께 인근 건물로 들어가 길을 물었다. 버스에서 두 정거장을 일찍 내린 거였다. "워밍업 한 번 제대로 하네." 남자는 스웨덴의 수퍼마켓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일본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로프웨이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지만, 동행은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등산은 각자 페이스도 있고 하니까. "그럼, 정상에서 보자구!" 로프웨이를 타기 전 준비를 단단히 했다. 등산화의 끈을 조이고 아이젠을 달았다. 스키장갑과 등산용 스틱도 챙겼고, 비상식량도 배낭에 넣었다. 로프웨이로 중턱까지 올라가지만 다이세츠산은 늘 눈이 쌓여있어 등산로가 험하다. 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가 조난을 당해 죽은 곳도 이 산이다. 로프웨이를 타고 중턱에 오르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데다가 안개까지 자욱해져 하늘을 향해 올라갈 수록 밑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다이세츠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그리고 홋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곳) 아사히다케는 해발 2291m다. 후지산보다 1000m쯤 낮지만 위도가 북쪽이어서 결코 만만치 않다. 로프웨이를 타고 약 1500m 지점에서 내린 뒤 등산로를 가거나 약 3km 거리의 산책로에 들어가 트래킹을 할 수 있다. 로프웨이에서 내려 안내소에 들어갔다. 등산객 등록 명부를 쓰고 있는데 안내원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등산을 하시려고 하나요? 오늘은 비바람이 거세고 안개 때문에 시계도 좋지 않아 무리입니다." "에이, 모처럼 왔는데 그래도 안 오를 수야 있나요. 천천히 올라갈게요." "정말로 위험하다니까요. 이 산에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사실 산책로 트래킹도 위험한 날씨라고요." 계속 아웅다웅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알겠다고 얼버무리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인사를 하는데 안내원은 말려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눈치를 챈 듯 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죽지 말라니. 지금껏 일본에서 낯선 이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직설적이었다. 어쩐지 살짝 웃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해서 그리 심각하게 듣진 않았지만, 조금은 놀랐다. 그저 주의하라는 거겠지. 그렇게 넘겼다. 씩씩하게 등산로를 올랐다. 과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안개 사이로 보이는 호수와 알록달록 색을 입은 고원 식물의 어우러짐은 절경이었다. 이 봉우리의 별칭은 '신들의 정원'이라는데 딱 그 말 대로였다. "오길 정말 잘 했지." 걷는 내내 배시시 웃음이 났다. 눈덩이를 뭉쳐 던져 보기도 하고, 크게 고함을 질러 보기도 했다. 등산로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길이 가파르고 험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차 싶었다. 등산로를 나타내는 로프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겠지. 이때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산이란 올라갈 수록 끝이 점점 좁아지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길은 더 이상 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걸어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정도로 가파른 언덕과 폭포만이 있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맙소사. 새하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만이 있었다. 비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빗줄기는 등산복을 뚫고 몸을 적셨고 바람은 몸무게 70kg의 성인 남자가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흔들릴 정도로 세게 불어왔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한 치의 허구도 없다. 최대한 담담히 그 때의 상황을 정리하려고 한다. 귓가에서 단순한 바람소리로는 들리지 않는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려보니 안개보다 조금 짙은 연기가 소용돌이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호기심이 일어 다가갔다가 아연실색을 했다. 분화구였다. 다이세츠산은 활화산이다. 이 산이 용암을 분출하는 구멍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무서웠다. 그래도 카메라를 들이댔다. 주변의 자갈과 바위는 유황가스에 물들어 에메랄드빛을 띄고 있었다. 공포가 느껴졌다. 옷이 젖으니 몸은 점점 추워졌다. 배가 고파져 바위에 몸을 숨기고 에너지바와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이제 완전히 새하얗기만 한 세상이 됐다. 절박했다. 정신없이 길을 헤멨다. 살짝 발을 헛디딜 뻔 해 아래를 내려보니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기어가듯이 걸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의 벼랑길이었다. 그래도 저 너머로 가지 않으면 영영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배낭을 동여메고 카라비너를 꺼내 스틱을 몸에 묶었다. 경사길을 암벽 타듯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에 파묻힌 돌 중에는 조금만 힘을 주면 떨어져버리는 것들도 있었다. 근 1시간을 기어올라 경사를 넘는 데 성공했다. 기진맥진했다. 몸이 더워져야 하는데 그냥 춥기만 했다. 경사를 넘었지만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러다 죽는걸까. 겁이 났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여기서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스마트폰은 당연히 불통이었고 그나마 온도가 너무 낮다보니 배터리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까 마신 유황가스 때문인지 머리는 어질거렸고 몸의 감각도 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잠시 눈을 붙이고 자면 편해질 것도 같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데 그러진 않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생각났다. 안내원 말을 들을 것을, 스웨덴 청년이랑 동행을 할 것을, 나는 왜 산을 가볍게 여겼을까, 시체는 발견되기나 할까. 이곳에는 곰이 자주 나타난다는데 먹이가 되는 건 아닐까.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바람소리에 묻힐 뿐이었다. 일단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계속 위를 향해 걸었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위로 올라가지지 않을 땐 울상이 됐다. 제발, 여기에서 돌아갈 수만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딸랑. 종소리였다. 어디선가 분명히 종소리가 났다. 귓가를 에는 칼바람을 뚫고 종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쩌면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산에선 곰이 나타났을 때 경보를 알리기 위한 베어벨을 소지한 패트롤들이 있다. 소리가 난 곳으로 무작정 뛰어갔다. 안개 너머로 종탑과 건물이 보였다. 거리는 제법 되어 보였다. 미친듯이 뛰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는데 얼굴은 눈물콧물 범벅이었다. 도착해 보니 임시 피난소였다. 종소리의 정체는 이 산에서 조난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종탑이었는데,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 피난소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불을 피우려고 했는데 태울 게 없었다. 일단 젖은 옷을 벗었다. 피난소 안 사다리를 타고 오르니 2층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웅크린 채 벽에 바싹 기대어 붙었다. 지도를 보니 피난소에서 등산 안내소까지는 불과 1km 거리였다. 이제 정말로 살았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불과 수 십분 전만 해도 죽니사니 했는데, 이제 존엄을 챙기게 됐다. 옷에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물기를 짜낸 뒤 입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웠지만 평온을 가장한 채 안내소를 지나쳤다. 로프웨이 승차장 근처로 가서 커피를 샀다. 최고의 맛이었다. 뜨거운 탕에서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사히다케 봉우리 근처에는 유명한 온천들이 있다. 로프웨이에서 내리자마자 온천을 향해 뛰어갔다. 하도 급해서 아무 곳에나 들어갔는데 스파가 딸린 'LA VISTA'라는 이름의 고급 호텔이었다. 리셉션에 물어보니 온천만 사용하는 것도 된다고 했다. 1500엔. 도저히 싼 곳을 찾아 돌아다닐 여유가 없어 돈을 내려고 하니 타월 대여료는 별도로 300엔이란다. 카케유(탕에 들어가기 전 몸에 끼얹는 물)를 대충 붓고 바로 탕에 들어갔다. 아, 그때의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천연온천수. 그제서야 욕탕을 둘러보니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탕이 바깥 경치가 보이는 발코니에 있었고, 노천탕도 널찍했다. 탕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실례한다'며 옆에 남은 또 하나의 개인용 욕조에 몸을 담궜다. 지긋해 보이는 나이임에도 깍듯한 경어로 말을 걸어왔다. "산에 다녀오셨나요?" "네. 날씨가 안 좋아서 도중에 포기하고 왔어요. 역시 위험하더라고요." "그래도 모처럼인데.. 혼슈에서 오셨어요?" "네. 지금은 도쿄에 살고 있지만 한국사람이에요." 노인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기소개를 줄줄 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왔다는 것. 지금은 방학이라 일본 전국을 여행 중이라는 것 등등. 30대 한국남자와 60대 일본남자는 산 속 온천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대화를 나눴다. 노인은 별안간 한일관계를 화제에 올렸다.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면 이 나라의 좋은 점도 한국에 많이 전해달라. 한일관계가 꼭 좋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한국을 잘 모르지만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양국이 함께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일본이 반성할 것은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온천을 마치고 나와 아사히카와역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오는 길에 만난 스웨덴 청년이 보였다. 잔뜩 지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멀찍이 앉아 눈인사만을 나눴다. 그가 정상까지 올랐는 지는 중요치 않았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걸 확인한 게 다행일 뿐이었다. 저녁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국도 주변의 싸구려 숙소는 역에서 한참을 떨어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버려진 아파트를 뜯어고친 듯 했다. 어쨌든 쉬고 싶었다. 침대와 이불만 있으면 된다. 내일은 후라노와 비에이에 갈 예정이지만 몸 상태가 괜찮을 지 걱정이 됐다.

From Tokyo t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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