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엄마의 '세 아들'육아 이야기 *

30만 부 판매를 기록한 스테디셀러 육아서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의 저자이자 여성학자인 박혜란 선생. 아들 셋을 키운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준 지 17년 만에 손주 6명을 둔 할머니의 생각,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으로 돌아왔다. ‘여성학자’라는 이름보다는 가수 이적의 엄마로 더 유명한 박혜란 선생.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성과 교육학에 관한 강연과 저술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7년차 할머니의 내공을 발휘해 젊은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신간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들 셋을 모두 ‘공짜로’ 서울대에 보낸 이야기와 자신의 육아 소신을 밝힌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를 발표한 지 꼭 17년 만이다. “아직도 가끔 자녀교육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요. 저처럼 아이 키운 지 30년이 넘은 사람의 말이 요즘 엄마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한동안은 딱 부러지게 거절했는데 손주가 생기니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며느리들이 손주 키우는 모습을 보니 지난 나의 육아에 대한 반성과 ‘이건 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들도 새롭게 보이고요.” <아이는 엄마 곁에 머물다 가는 ‘손님’> 박혜란 선생이 아이들을 키울 때와 지금은 육아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엄마의 불안감이다. 수많은 육아 전문가들이 ‘아이를 믿고 지켜보라’고 조언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더욱 어렵다.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 우리 아이만 뒤처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시시때때로 엄마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남들 따라한다고 꼭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나중에 아이에게 할 말은 있을 터. 그래서 잔소리와 큰 소리를 번갈아 내며 오늘도 아이를 잡는다. 머리로는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 있지만 정작 손발은 엉뚱하게 움직이는 격이다. 오죽하면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를 안 보면 불안하고, 보면 화가 난다’는 말까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호소하는 젊은 엄마들에게 박 선생은 ‘거리 두기’ 처방을 내린다. 이는 아이를 아무렇게나 방치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엄마들은 누구에게나 이중적인 심리가 있다. 아이가 독립적이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곁에 계속 머물기도 바라는 것. 이렇게 귀하고 예쁜 아이가 내게서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지기 때문이다. 거리 두기를 다르게 표현하면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는 의미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조금만 내게 잘해줘도 한없이 고마워지고 손님이 저지른 웬만한 일에는 화도 잘 나지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할 이유도 사라지고 억지로 먹이려 할 필요도 전혀 없다. 오히려 언젠가 닥칠 이별이 문득 떠오르면 마음이 애잔해지고 아이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아이와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다면 서글프지만 손님처럼 항상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 공부는 어떻게 시키셨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요즘은 ‘아이들 적성을 어떻게 찾아주셨어요?’라고 묻더군요. 아이들 직업이 건축가, 가수, 드라마 PD이다 보니 뭔가 특별한 육아 비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20~30년 전만 해도 ‘성적’이 아이들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부모들은 확실히 ‘적성’을 중시한다. 이 말은 부모의 할 일 리스트에 ‘남보다 빨리 아이 적성 찾아주기’가 추가됐다는 의미와도 같다. 답답한 부모는 아이의 적성을 찾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학원 순례를 시키고 적성검사도 받게 하고, 선배맘의 경험담도 듣는다. 그 와중에 운이 좋으면 적성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원 순례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사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아닌 이상 어릴 때부터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가 어디 흔한가. 더구나 우리는 아이가 조금만 말문이 빨리 틔어도 ‘우리 애가 언어 천재인가 보다’ 하는 철없는 부모이거나 남들보다 조금만 뒤처지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어리석은 부모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적성을 타고나는 건 맞지만 그것이 언제 드러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조바심 낼 것도, 아이의 적성을 찾아주지 못한 자신을 무능한 부모라고 자책할 필요도 전혀 없어요. 한 가지 팁이라면 아이들을 가급적 많이 놀게 하라는 거예요. 아이들은 놀 때 누구 눈치 안 보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거든요. 어른이 그렇듯 아이들도 놀다 놀다 지치면 심심해서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게 돼요. 그때 아이 손에 들린 책 한 권, 스스로 만드는 놀이 하나가 ‘적성’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어요.”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낸 가정이라고 하면 엄마와 아이들이 별로 큰 소리 낼 일이 없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박 선생은 아이에게 늘 친절하게 대하고 화도 절대 안 내는 엄마는 ‘드라마’ 속에만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기질이 순해서 남들보다 좀 수월하게 키운 면은 있지만 셋이나 되는 아들들과 지지고 볶는 일이 왜 없었겠는가. 자존심이 상하고 얄팍한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 아이를 누르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는 우선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열 번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다음에는 ‘아이보다 30년이나 오래 산 어른이 아이와 맞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이런 ‘마음공부’를 수백 번쯤 거치면 아이의 미운 말에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만한 내공을 쌓기까지는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실패하는 과정을 무단히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아이란 세상에서 가장 객관화하기 힘든 존재인 까닭이다. ‘좋은 엄마’의 기준이 한 가지일 수는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헬리콥터맘이나 타이거맘이 좋은 엄마일 수도 있고, 그런 엄마 노릇이 적성에 퍽 잘 맞는 엄마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육아법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육아법은 자신은 물론 아이에게도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남들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너무 관심가질 필요도 없다. 남들은 그들의 아이를 키우고 나는 내 아이를 키우는 것이니까.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수많은 방식이 있고 반드시 엄마가 원하는 대로 키워지지도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어깨가 가벼워진다. “엄마가 모든 걸 알고 해결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나이가 반드시 혜안을 만들어주진 않거든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내가 모르던 내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육아는 아이가 힘들어하면 엄마가 조금 거들어주고, 엄마가 힘들 때는 아이에게 기대어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이에요. 그러면서 아이도 크고, 부모도 함께 자라는 거죠.” <아이보다는 ‘엄마 인생’에 더 욕심내라> 또 하나 명심할 점은 심리적·시간적·경제적으로 자녀에게 몽땅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면 최소한 경제적인 부분만큼은 올인하지 말자. 평균 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 부모는 아이를 키워 사회에 내보내고도 앞으로 6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을 잘 보내려면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도 찾아야 하고 당연히 경제활동도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아이의 교육비에 쏟는 금액 절반은 뚝 떼어 노후자금으로 묶어두자. ‘아이만 잘되면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 이는 자식의 부모 부양을 당연시 여기던 시대에나 통했던 생각이다. 정말 자식을 위하는 부모라면 나중에 저 살기도 바쁜 자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아이를 키우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 세우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저 역시 아이들과 살 비비며 사는 게 좋아서 ‘엄마’가 딱 내 적성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니 ‘학부모 노릇’이 싫은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죠. 나이 마흔에 공부를 시작하고 남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가르치는 ‘진짜’ 적성을 찾은 건 일생에서 제가 제일 잘한 일이에요. 아이를 다 키우고 나면 너무 늦는 게 아닐까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요. 겪어보니 인생의 방향이 중요하지, 나이는 생각보다 큰 영향이 없더라고요.” 박혜란 선생은 젊은 엄마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당부한다. 이만큼 살아보니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은 잠깐이었다고, 지금은 ‘이 아이가 대체 언제 크나’ 싶어 아득해도 결국 금세 지나간다고, 되돌아보면 아이 키우는 것만큼 재미있고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마음 편히 육아를 즐겨라. 어차피 아이는 우리 집에 20~30년쯤 머물다 떠나갈 ‘귀한 손님’이니. Profile 박혜란 1946년생. 20대 시절 대학 연극 동아리에 빠져 살았고 졸업 후 6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둘째를 낳은 뒤 육아를 위해 퇴직하고 평범한 전업주부로 10년을 살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이후 여성문제와 교육문제에 관한 글쓰기와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슬하에 아들 셋과 손주 여섯을 두고 있다. 현재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여성 및 교육 운동에 관한 일을 재미있게 해나가고 있다. 육아서 외에 <나이 듦에 대하여>, <여자와 남자>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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