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단검>, 실천문학사

8월의 염천, 서울역 광장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잠자던 한 할머니가 문득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길게 빨더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 어디냐 묻는다 남대문 방향을 가르키며 남대문 시장이라 말했더니 가장 큰 시장은 어디냐 물었다 아침 햇살이 얼굴에 쏟아져 몹시 더웠다 남대문 시장이 가장 크다고 일러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내가 물었다 수원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순간 수원시가 아니라 수원부와 같은 조선 후기 지명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을 사려고 그러냐 물었더니 무엇을 팔려고 한다고 하였다 신문지에 둘둘 싸고 다시 보자기에 싼 뭉치가 하나 옆에 놓여 있었다 뭔데요 몰라도 된다고 대답할 때는 마치 함흥 사투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차라리 동대문 벼룩시장 같은 난전에 물건을 펼치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럴 물건이 아니라고 화를 냈다 뭐냐고 다시 물으니 할머니는 일어서며 말했다 칼이다 이눔아 서울역에서 지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남대문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잠자던 한 자루의 단검이 꼿꼿하게 한성역 광장을 건너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 우대식, <단검>, 실천문학사, 2008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시집을 건졌다. 서점의 시집 판매대를 기웃거리는 일은 자주 참혹했다. 이름값을 지닌 시인들은 제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더 시를 쉽게 썼다.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 시집을 읽는 일은 괴로웠다. 몇 년을 응축해 나온 책이 겨우 그것뿐이라는 건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도 생활인이기에, 책을 팔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기에 함량미달의 시집들이 그렇게나 쏟아져 나오는 것인가. 기대를 걸었던 새파란 시인들의 두 번 째 시집들에도 모두 실망했다. 참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읽어서 행복한, 속이 알찬 시집을 만났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와줘서 고맙다. 이 책은 실천문학사답게, 젊고 푸르며 곧게 날이 서 있다. 말 그대로 '단검'같은 책이다.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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