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싸롱의 멸치국수

제주 바다 가운데 표선해수욕장이 있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넓은 모래사장을 품고 있는 표선은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걷는데만도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광활한 바다다. 물이 쓸려나가면 해변밭은 그대로 거대한 운동장이 된다. 썰물때면 사람들은 신발을 손에 쥐고는 발자국마다 사락사락 해수가 솟아나는 부드러운 모래밭을 거닐곤 한다. 물이 빠진 벌판은 몇 개의 고운 모래톱을 만들고, 저 너머에선 맑은 바다가 인사하듯 찰랑거린다. 물이 도로 들어왔을 때에도 표선의 바다는 한참까지 수심이 깊지 않아 너나할것 없이 물놀이를 즐기기에 맞춤하고, 새벽녘이면 크넓은 해수욕장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에 뒤덮인다. 표선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바다다. 표선은 작지 않은 읍내를 가까이에 둔 전형적인 바닷가마을이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대기업 현대가 대형 리조트를 그곳에 지으면서 상업의 비린내가 동네에 급속히 침투해 들어왔다. 회장과 임원들이 골프를 치고 휴양을 즐기러 머무는 곳이 되고, 그룹 차원에서 복지비를 지원 받는 계열사 회사원들이 서울식의 서비스를 요구하게 되면서 표선해수욕장은 유흥가가 즐비하게 늘어선 관광지로 바뀐다. 가장 싼 식사메뉴가 만원을 홋가하는 식당도 생기고, 양식 생선과 곁반찬으로 한상 차려내고서는 계산서에 15만원씩 적어놓는 횟집들이 늘어난다. 낮은 지붕의 오래된 민박과 제주 전통 음식들을 고집하는 낡은 밥집도 있지만 표선에서 그들은 이제 뒤로 비껴 있다. 막개발에 밀려난 원 주민들처럼. 그럼에도 제주가 좋은 곳인 까닭은 자본과 非자본이 아직 공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휘황한 도시의 너머에는 바다가 여전히 쪽빛 물결을 출렁이고, 쭉 뻗은 도로를 10분만 달리면 산자락과 오름이 살가운 곡선을 드리운다. 바람은 돌틈 사이를 빠져나와 버스의 차창을 두들기고, 사람들은 과속하는 자동차들 건너에서도 둥근 입매를 내보인다. 표선 역시 짙은 화장을 덧바른 대형 점포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삶과 지역을 지켜온 토박이들의 거칠지만 속깊은 가게들이 점점이 빛을 뿜고 있다. 춘자싸롱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조그맣고 연약한 가게다. 표선읍사무소 4거리 부근의 방 한 칸을 세내 간판도 없이 장사하던 할머니는 2년 전, 코끼리마트 앞의 번듯한 점포를 얻어 공간을 넓혔다. 이름도 춘자국수로 바꿨다. 질좋은 멸치를 오래 끓여내 오늘 삶은 소면에 붓고 송송 썬 파와 고춧가루 한움큼을 뿌려선 양은냄비에 담아내는 국수 한 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그만이다. 면적을 키웠다고는 하나 농담으로도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게는 점심을 전후한 두어시간 동안은 합석이 필수다. 서너 시쯤 점심 손님들이 빠진 후 가게를 들러 국수를 주문하면 의의로 상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할머니가 국수를 새로 삶아 내주는 까닭이다. 점심 장사야 찾는 이들이 많으니 미리 삶은 소면을 준비할 수 밖에 없지만, 그때가 지나면 가능한 적은 양만 삶아 맛이 살아있는 국수를 손님 앞에 내놓고자 하는 것이다. 속도 모르는 이들은 국수 한 그릇이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고 철없이 할머니를 채근하지만 말이다. 제주에서도 가끔 나는 사람들이 싫어진다. 조용한 해촌에서도 불콰하게 취해 종업원을 괴롭히거나 모래밭에 욕지기를 하는 관광객들, 세미나인지 워크샵을 와서는 사장이고 상사랍시고 아랫 직원들에게 노래나 춤을 강요하는 직장인들, 중국산 양식활어를 가져다가 근해 자연산 희귀어종이라며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들, 깜짝 놀랄만한 대형 간판과 눈부신 조명을 걸어 옆집을 눌러버리라고 설득하는 업자들, 렌터카로 바닷가를 한번 휙 가로지르고는 별로 볼 것도 없다며 쓰레기나 버리고 가는 사내들... 돈은 어쩌면 이토록 끈질기게 섬의 구석까지 따라붙는 것일까. 환멸과 쓸쓸함에 섬에 온 시간마저 움푹 괴어 무거울 때, 치료약은 딱 한 가지다. 춘자싸롱의 국수 한 사발. 표선읍사무소 4거리를 찾아가 작고 헐한 가게, 샷시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는 할머니께 "멸치 하나요"를 외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국수가 아닌 정성을 한소끔 삶아, 시지 않은 깍두기 아니 잔정을 곁들여 시린 가슴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저 시치미를 떼고,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삼키고 국물을 마시면 된다. 가게를 나올 즈음이면 가게의 반투명 창으로 비치던 햇살처럼 말갛게 마음이 개어 있을 테니. 나는 그 진료비와 약값으로 천원짜리 두어 장만 내면 된다. 그 병원은 웬만해선 쉬지도 않는다.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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