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 이십칠 분

그림을 그리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고 와인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아버지의 전화에 시달렸고, 부모님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 괴로워했고 나보다는 고양이를 갈구했다. 밤공기를 마시면 숨을 쉬지 못하는 여자. 나는 다행히도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민영을 처음 만난 건 공항검색대를 지나 게이트로 가는 길에서였다. 트랜치코트에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는 단연 돋보이는 관광객이었다. "멀리 가시나 봐요?" "아니요. 금방 돌아가야 해서요." 별다른 대화를 거치지 않고 스모킹룸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뒤를 밟는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셋, 멀리서 지켜보는 치들까지 합치면 일곱은 되어보였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동요할 만큼 어리숙한 놈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며 그녀를 따를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일을 진행할 것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가장 실패할 확률이 높은 건 나처럼 이동 중에 말을 걸어 주의를 흐트러트리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담배 뭐 피우세요?" "버지니아요." "얇은 거요?" "멘솔." 어쭙잖게 대화를 이끌고 있는 나를 보며 부스에 앉아있던 한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역시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저도 그건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어정쩡한 자세로 불을 받고, 주머니에서 듀퐁을 꺼내 불을 붙여주려는 찰나, 부스에 있던 놈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 놈의 움직임은 우리 모두가 파악하고 있을 만큼 동작이 커서 별 위협이 못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그녀와 놈을 갈라놓고 연기를 내뿜었다. 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행히도 그는 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연기를 내뿜으며 이번에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행 오신 거예요? 혼자?" 약간 조바심을 내며 물었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는 여기가 고향이거든요. 근데 부모님도 다 시골로 가시고 친구도 별로 없으니, 잘 안 오게 되네요." 역시 미소와 끄덕임, 일곱 중 넷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은 건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놈 하나. 그리고 어느새 부스에 진입한 재빠른 놈 하나. 아마도 그들은 한 패일 것이다. 타들어간 담배를 털어내며 놈이 피할 수 있게 팔을 휘둘러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놈이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역시 곧 시야에서 모두 사라졌다. 이제 타겟에 접근한 것은 나뿐이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남은 꽁초를 비벼 끄는 순간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담배도 얻어 피웠는데,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동네 구경도 시켜드릴 겸." "술이 낫지 않을까요? 금방 돌아가야 해서." 그리고 나는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여자. 와인을 증오하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여자.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 밤공기를 마시면 숨을 쉬지 못해 호텔을 찾는 여자. 그리고 새벽이면 아버지의 전화에 시달리는 여자. 다행히도 나는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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