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하나 잔. 미궁(Labyrinth) - 5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뿔이 1/3가량 잘린 코뿔소 한 마리가 오른 다리를 절며 힘겹게 들어섰다. 그는 묵직한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고, 부엌에서 식어버린 계란말이를 주워 먹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놓고 간 가방만이 거실을 묵직하게 채웠다. 지퍼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쇳덩이는 가방 속에서 날카롭게 침묵하고 있을 공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침묵 속에는 아마도

공원에서 만난 아르마딜로의 리어카가... 벤치에 두고 온 에어캡이... 두 마리의 까마귀가... 어둠에 잠겼을 공원이... 스며들어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친 코뿔소는 절뚝절뚝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아니. 쓰러졌다. 그는 짊어지고 온 가방보다 가벼웠고, 공구들만큼 고요했다. 안경을 쓰고 날짜 지난 신문을 읽는 코뿔소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비누 냄새와 신문의 잉크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신문을 넘기는 소리와 코뿔소의 가녀린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빗줄기가 거세지며 코뿔소의 향과 고동 소리가 점점 희미해질수록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부상했다.



띠링.

엄마 지금 가고 있어. 아빠는 오셨니? 저녁 맛있는 거 해줄게. 기다리렴.♡



휴대전화의 시계는 7:40을 가리켰다. 다시 나갈 시간이다. 아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에게 코뿔소는 뭉툭한 손으로 5만 원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차비 써라." 가녀린 심장 소리만큼 작고 슬픈 울림이었다.



비를 맞으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아르마딜로가 사라진 길을 더듬으며 공원을 빠져 나오자 눈앞에는 여섯 대의 타워크레인이 설치 된 공사현장이 펼쳐졌다. 800M 높이의 주상복합단지가 세워질 예정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조감도에는 SF 영화에 나올법한 거대한 건축물이 그려져 있었다. 800M라니. 상상이 안 될 높이다. 타워크레인이 80M. 이 크레인보다 10배나 높은 건물이라니. 경외심마저 들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인류는 이제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는 하늘로 올라가고 남겨진 누군가는 하늘을 동경하며 살아갈 것이다.

비는 조금씩 그쳤고, 구름 사이로 윤곽만 보이던 반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크레인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지며 보다 작은 그림자들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겹쳐진 그림자 속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까마귀였다. "따라오시죠." 까마귀의 등장은 항상 갑작스러웠고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미용실의 까마귀일까? 아르마딜로를 데리고 간 까마귀일까? 아니면 둘 다 아닌가? 그러고 보니 S역시 까마귀가 데리고 간 것이 아닐까? 까마귀는 타워크레인의 조정석으로 안내했다. 작은 상자같은 그 곳은 작은 백열전구 하나만이 달랑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앉으시죠.” 까마귀가 손짓한 곳에는 ‘ㄴ’ 모양의 쇳덩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그의 성화에 못 이겨 구겨지듯 의자에 앉았다. 까마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위압적으로 팔짱을 꼈다. “당신은 오늘 미용실에 갔습니다.” “네.” “그 곳에서 잡지 한 권을 읽으셨죠?” “네. 칼럼 하나를 읽었습니다.” 까마귀는 턱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 “제목이 뭐였죠?” “그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제목과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칼럼따위 읽지 않은 것은 아닐까? 까마귀는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쏘아 붙였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위협적인 닦달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것은 머리를 감겨주던 까마귀의 부푼 가슴과 노래 후렴구 뿐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기억이......"



"됐습니다! 전 당신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기회를 내친것은 당신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까마귀는 깊은 한숨처럼 사라졌다. 어쩔 수 없다?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럼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르마딜로가 공원에 앉아 에어캡을 터트리는 것도. 그들이 매일 아침 문자를 보내는 것도. 코뿔소가 다리를 저는 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어쩔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굳이 이런 사실들을 가슴에 간직하며 지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S의 부재였다. 이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무겁게 자리잡아 버렸다. 거대한 이 덩어리는 무슨 수단을 써도 옮길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릎을 모아 양팔로 끌어 안았다. 까마귀가 사라진 허공에는 낯선 어둠이 연기처럼 흔들렸고, 이내 사라졌다. 주머니 속에서 S의 편지를 꺼냈다.



Q에게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식상하지만 '안녕, 어떻게 지내?' 라고 시작하면 될까? 아니면 우선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할까? 잘 모르겠어...... Q. 조금 전 아우구스트 3세가 죽었어.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먹질 못하더니 결국 내 곁을 떠났어. 한 생명이 세상을 떠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 사실이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나. 그래서 눈물이 나......마지막까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내게 남은 건 너뿐이야. 정말 이기적이지? 떠날때는 언제고 지금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못된거같아......이런 나라도 넌 받아줄까? 아마도 받아주겠지? 다시 눈물이 나. 잠시만 쉬어야할 것 같아. 아주 잠시만...... ......아우구스트 3세를 화장시키고 왔어. 이 하얀 가루를 아우구스트 3세라 할 수 있을까?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아마도 일주일 후, 그날이 되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들어. 두렵지만 너와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조금은 그 날이 기다려져.......



편지에 적힌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도시 곳곳을 배회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힘 빠진 손아귀에서 벗어난 편지는 80M 아래로 느릿느릿 추락했다.


띠링.

야, 연락 좀 해라. 너 요즘도 사람들이 동물로 보이냐? 그거 병이다. 병원 가봐라. 걱정된다.



띠링.

아들, 어디야? 늦었는데 들어오지?



띠링.

아들보곳시ㅍ다



세 통의 문자가 동시에 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에 뜬 반달은 코뿔소와 아르마딜로의 눈동자를 닮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5만원 지폐가 닿았다. 지폐를 만지며 S에게 전할 말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바스라진 추억의 부스러기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다시 하늘을 보았을 때 달은 점점 거대해지며 하늘을 뚫고 지구로 낙하 중이었다. 그제야 S의 편지에 적힌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휴대전화가 미친 듯이 울린다. 전원을 끄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S의 축축하고 따뜻했던 원룸. 아르마딜로와 함께 한 공원의 벤치. S의 손길을 닮은 미용실 고양이'씨. 식탁 위 계란말이와 쪽지. 코뿔소의 눈동자...... 이제 곧 달과 인류는 하나가 된다.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없었다. 단지 'S를 만날 수 있구나.' 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시작했다. 3...... 2...... 1...... 거대한 빙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꿈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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