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왕조 말 백련교 최대의 반란을 이끈 여성 지도자 왕총아(王聰兒)

백련교란 하늘과 땅이 개벽하고 다음 개벽까지의 시기를 나타내는 불교의 겁 사상과 미륵 사상이 결합해서 석가모니가 사망한 이후 한 겁이 지나고 새로운 겁이 시작되어 미륵불이 내려온다는 사상으로 불교에서는 사교로 배척하고 있다.

남송 초 모자원을 교조로 해서 백련종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술적 경향이 짙어져서 송, 원 왕조 때부터 자주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이 미륵불 신앙은 당시 생활난에 허덕이던 서민층에 쉽게 수용되었고 그들은 종교적 비밀결사까지 만들어 탄압하는 정부에 반항했다.

이런 백련교도의 반란은 원, 명대도 자주 일어났지만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 청나라 가경조 때 일어난 반란이다. 이때 일어난 백련교의 반란을 이끈 여성 지도자가 왕총아다. 그녀는 호북성 양양 사람으로 어릴 때는 부친을 따라 유랑하면서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결혼하고 남편인 제림의 영향으로 백련교 신도가 됐으나 청나라 조정에서 1775년 백련교를 이끄는 백련교주 유송이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것을 계기로 이들을 탄압하고 많은 신도를 죽이자, 요지부, 제국모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양양, 지강 등에서 백련교도들이 호응하며 반란의 불길이 커졌다.

15만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며 청나라 정규군과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을 피하며 8개 부대로 나눠 기습 공격 등을 주로 해서 그들을 고전하게 하였다.왕총아가 이끄는 백련교 반란군이 사천, 호북, 섬서, 감숙, 하남 지방으로 진격하자 태평, 달주, 동향 등에서 이에 호응하였으며 5월에 달주의 군사들이 청나라 군사와 지방 향용에게 백수에서 포위되자 이를 공격해서 포위를 풀었다.

가경제 3년 왕문웅, 최문 등이 이끄는 청나라 군사들을 한중에서 격파하고 장안으로 갔으나 패하고, 산양으로 진격했으나 연도에서 청나라 군사와 지방 향용의 공격을 받아 운서의 삼차하로 퇴각하여 그곳을 통해 호북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삼차하에서 청나라 군사와 지방 향용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자 1798년 적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며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고, 이로써 9년이나 계속됐던 백련교의 난은 마침표를 찍게 된다.

왕총아가 이끄는 백련교도의 난은 당시 고단했던 백성들의 청나라에 대한 반항이었다. 청나라는 정규군으로 이들의 봉기를 진압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지방 향용에게 많은 의지를 하게 된다. 결국, 왕총아의 난은 지방 향용과 청나라 군사의 합동 작전으로 진압됐으나 이후 지방의 지주층이 조직했던 향용들의 힘이 강해지며 청나라는 점점 멸망을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볼 때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은 왕조는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보여줬다.

일본어 번역작가 김영택의 블로그 chb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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