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이익!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관성이 몸을 덮쳐왔다. 나는 앞으로 쏠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주위를 살폈다. 70은 더 되어보이는 노부부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았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안고 있던 고양이를 달랬다. 한 자리 건너 앉아있던 샐러리맨은 자리에 일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입구에 앉은 단발의 여자는 묵묵히 창 밖을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급정거에 대한 걱정보단 객실을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가슴이 뛰었다.
긴장감 가득한 적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둠 그 자체였다. 어둠과 적막.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고. 며칠 전 보았던 b급 스플래터 무비(Splatter Movie)가 떠오른다. 여행을 떠나던 6 명의 대학생들이 짙은 안개에 갇혀 살인마에 의해 차례차례 살해되는 영화였다. 여느 b급 스플래터 무비(Splatter Movie)처럼 어색한 특수분장과 무식한 살인방법이 러닝타임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영화 속에서 사람의 몸은 폭력에 의해 철저히 분해되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기억에 남는 것은 금발 미녀의 커다란 가슴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손으로 창문에 낀 서리를 닦아내자 선두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입구에 앉은 단발머리의 여자도 저 불빛을 보고 있는 것일까? 10분정도 지나자 누군가는 기다렸을 법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저희 열차는 다음 역인 XX역에서 발생한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잠시 정차하도록 하겠습니다. 손님 여러분들께 많은 심려와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젠장!’
"젠장."
샐러리맨은 내가 속으로 삼킨 욕을 대신해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신경질적으로 객실을 나갔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불쾌한 듯, 아니면 안내방송의 내용이 짜증난 듯 입구의 여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무심하게 턱을 괴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부부는 씁쓸히 웃으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귤을 꺼내었고, 소녀는 진정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불안에 찬 눈동자로 가지런히 앉았다.
'스플래터 무비의 분위기였던 열차내부가 이제 미스터리 스릴러(Mystery Thriller)로 장르를 바꾸었군.'
이런 생각이 들자 밀려왔던 짜증도 한결 가셨다. 샐러리맨은 진득한 담배냄새를 끌고 돌아왔고 그 때문에 객실의 온도는 한층 더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코트의 깃을 잔뜩 세우고 양 팔로 최대한 몸을 끌어 안았다. 그러고 보니 여학생은 어떻게 고양이를 데리고 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