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 잔. 기차는 고양이 왕국으로 - 4

열차 밖은 상상이상으로 추웠다. 밤하늘엔 보름달이 환하게 걸려있었고, 등 뒤에선 열차의 희미한 불빛이, 그리고 앞에선 차장의 손전등 불빛이 반짝였다. 우린 기계처럼 차장이 비추는 선로를 따라 걸었다. 다시 열차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15분을 걸었을까.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 연기가 보이시죠?"

차장은 손전등을 멀리 비추었다. 담배 연기 같은 희뿌연 무언가가 어렴풋이 보인다.

"조금만 힘냅시다."

차장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린 더 이상 선로가 아닌 어둠 속에 사라져버린 연기를 쫓으며 걸었다.마침내 도착한 간이역은 건물이라기보단 선로 옆에 버려진(말 그대로 누군가 툭 놓고 간 듯한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나무상자처럼 보였다. 실제로 나무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눈의 무게를 못 이겨 폭삭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자자, 어서 들어가시죠."

차장은 서리가 잔뜩 낀 유리문을 밀며 앞장섰다.

유리문이 열리며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감쌌다. 차장과 비슷한 제복을 입은 노인이 난로불을 지키고 있었다. 벽 한켠에는 시계가 걸려있었는데 9:40을 가리킨 채 움직이지는 않았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박였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브라운관 TV와 오래된 커피 자판기가 위태롭게 세워져있었다. 멀쩡해보이는 것은 중앙에 놓인 난로와 그 불을 지키는 노인 뿐이었다.

"나의 성에 어서들 오시게."

노인은 웃으며 차장과 악수를 나누었고, 노부부를 난로가로 안내했다. 남은 인원은 각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부실한 간이역에 대한 실망감보단 마침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피로감이 밀어닥쳤다. 그래서인지 난로가 내뿜는 희미한 열기는 몹시 따뜻했고 의자는 푹신했다......

역에 도착하고 얼마나 흘렀을까? 벽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9:40을 가리켰다. 샐러리맨은 동전을 먹은 자판기와 씨름 중이었고, 차장과 역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부부는 난로 위에 감자를 올려두고 담소를 나누었다. 구수하게 익을 감자를 생각하니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귤이 있었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귤은 따뜻하고 말랑했다. 재빨리 껍질을 벗겨 입으로 가져가는데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이 쪽을 보고 있었다. 괜히 무안해진 나는 실없이 웃으며 귤 반쪽을 건네며 물었다.

"몇 살?"

소녀는 몸을 움추렸고, 내 얼굴과 귤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레 귤을 받아 들었다.

"15살요."

"15이면...... 중2?"

"네. 아저씨는요?"

"나? 난 32. 어디로 가는 중이야?"

소녀는 대답없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못들은 건가? 다시 한 번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대답을 구할만큼 궁금한 사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대로 대화가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귤은 미지근하고 너무 달아서 오히려 맛이 없었다. 한참 자판기와 씨름 중이던 샐러리맨은 이젠 먼지 가득한 TV를 만지고 있었다.

"고양이 왕국요."

샐러리맨이 막 TV의 전원을 켰을 때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는 너무 작고 조심스러워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뭐?"

"고양이... 왕국요...... 얘를 고양이 왕국으로 데리고 가는 중이에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안 믿으시죠?"

고양이 왕국이라니......동화에서나 나올 단어였다.

"뭐, 그렇지. 고양이 왕국? 다른 누가 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소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남은 귤을 한 번에 입 속으로 넣었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 사이로 과즙이 살짝 흘러내렸다. 가방을 뒤적여 티슈를 찾았지만 소녀는 이미 소매로 입술을 닦은 뒤였다.

"그래도...... 다른 어른들처럼 비웃지는 않으시네요......"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관심을 소매의 얼룩으로 돌렸다. 비웃지 않는다? 아니었다. 비웃을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노부부는 늙은 역장과 함께 감자를 나눠먹으며 고향이 어디냐, 자식은 몇 이냐 등등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샐러리맨과 차장은 노이즈 심한 브라운관의 화면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는데, 무슨 프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녀는 피곤한 듯 꾸벅꾸벅 졸았고, 반대로 고양이는 충분한 숙면을 취했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로 옆에서 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의자를 연결해 소녀를 눕혔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깊은 잠에 빠졌고, 고양이는 대합실 곳곳을 서성였다.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라이터가 없다. 불을 빌릴까? 하지만 심각하게 TV를 보는 차장과 샐러리맨에게 말을 걸기 꺼림칙했다. 그대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잠은 안 왔지만 눈을 감았다. 소녀가 말한 고양이 왕국은 어떤 모습일까?

꿈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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