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친 민족주의의 비극

1.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관학교에도 '교환학생' 제도가 있다. 다른 말로는 위탁교육/수탁교육이라고 하는데, 한국 생도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위탁이요, 반대로 해외 생도가 한국 사관학교로 파견되는 것은 수탁이라고 한다. 현재 내가 강의를 나가는 공군사관학교에는 태국, 알제리, 베트남, 일본, 터키, 몽골 등에서 온 수탁생도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어제는 이 수탁생도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강좌의 첫 날이었다. 내가 맡은 반에는 알제리, 태국, 베트남, 일본 생도가 들어온다. 일본 생도를 제외한 셋은 4년 풀타임으로 한국에서 학업을 수행하고, 일본의 경우에는 3학년 때 1년 동안만 한국에 머무른다. 어제 만났던 일본 생도도 지난 금요일에 막 한국에 들어왔노라고 했다. 아직 한국어가 많이 서툰 편이라서, 나와 그 생도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마구 뒤섞어가면서 국적불명의 대화를 했다."그런데 왜 한국으로 왔나요?""한국, 일본, 가깝습니다. 그런데, 아... 서로, much trouble, 에... idea가, 생각이, 다릅니다. 달라서, 공부합니다. 한국 사람 생각, 공부합니다."한국과 일본은 가깝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무척 나쁘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생각하는 바도 너무나 다르다. 나는 그게 궁금했다, 과연 한국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이 생도가 해준 이야기는 나를 일순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기가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다고 한다. 고작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독도는 한국땅이다."

2.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금지 가처분을 당했다. 여기에 대해서 긴 말은 않으련다. 왜냐하면 긴 말을 할 가치도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성과에 대한 판단은 학계가 하는 것이 옳고, 그 과정은 법적 절차가 아니라 토론과 비판이라는 공론장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 맞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간에 한 학자의 학문적 성과를 법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거다. 문제는 이런 폭거를 한국사회가 '아무렇지 않게'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내가 정말로 놀란 점은, 정작 박유하 선생 자신은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그 어떤 논란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주제로 한 각종 토론이나 서평 등에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참고인(?)인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말하자면 애초에 건전한 토론이나 비판을 수행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는 뜻이다.단지 중요했던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얼마나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는가를 재단하여, 이를 처단하는 일뿐이었다. 한국의 언론과 여론, 나아가서는 사법부까지도 일관되게 이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현상인지, 사람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인류의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된 경우는 많지 않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30년대의 나치 독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더 있다.바로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다.

3.

백색테러가 또 하나 터졌다. 이번에는 사태가 좀 크다. 미국 대사가 습격을 당했다. 습격을 행한 범인은 과거 일본 대사에게도 콘크리트 뭉치를 던져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미 대사가 습격을 당한 원인은 뚜렷하다. 얼마 전 미국이 한-일 관계에 대하여 과거사 청산을 언급했던 것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거사 문제에서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실제 의도야 어찌되었든,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맥락으로 읽힐 여지가 다분하다.이 사건으로 명확해진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는 이미 제어 불가능한 상태로 폭주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국한 일본 생도에게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날선 외침이 던져지고, 위안부 문제를 민족 차원보다는 규율권력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의 관점에서 보자던 학자의 주장이 출판금지 가처분을 당하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국가의 대사가 백주대낮에 습격을 당한다.한때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것을 일종의 금과옥조로 여겼다.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이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기도 하다. 36년의 식민지 통치를 견뎌내고, 뒤이은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게끔 만든 정신동력으로서 민족주의는 뚜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에게 민족주의라는 것은 타인(외국인)에 대한 멸시를 합리화하거나, 다양성에 대한 부정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거나, 지성에 대한 멸시를 쿨함으로 여기거나, 혹은 권력자가 시민들의 눈을 가리워 자신의 지지도나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한국사회를 건실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했던 지난 시절의 동력은 어디론가 소산되어버리고 말았다.

4.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원칙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컨대 내가 아무리 올바른(혹은 올바르다고 믿는) 주장을 내세울지라도, 그 올바름이 모든 수단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편리한 가치관에 기대어 온갖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나아가서는 '폭력적인' 수단까지도 정당화시켜버리고 마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만주는 우리땅"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다. 심지어 혹자는 그것을 애국이라고까지 말한다. 지금은 엄연히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어있는 땅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방식이 과거 나치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이 타국의 영토를 강제점탈하기 위해 취해왔던 수법이라는 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돌아오는 반응은 '비국민' '비애국자'라는 싸늘한 시선뿐이다. 이런 반응조차도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전혀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다.미국 대사에 대한 테러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한국 사회는 지금 벼랑 끝에 와 있다. 다양성에 대한 부정, 지성에 대한 멸시, 폭력에 대한 합리화, 이 모든 상황들은 하나같이 파시즘 사회를 나타내는 지표들이다. 한국 사회는 너무나 '명확하게' 파시즘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리고 이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선두에는 민족주의라는 깃발을 커다랗게 내걸고 있지 않은가.도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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