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관세대는 정말로 '달관'하지 않았다.

일본의 사토리세대에 이어, 우리나라에 달관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사토리세대의 '사토리'는 깨달음,득도 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로, 마치 득도라도 한 것인양 욕망을 억제하며 돈벌이는 물론 출세 등 경쟁적 요소를 가진 것들에 관심이 없는 세대를 뜻한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자족'하는 삶을 살 줄 아는 현명한 세대로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 패기를 잃은 젊은 세대로 보기도 한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최저임금이 높아 알바생도 빌어가며 구해야할 정도로, '아르바이트'만으로도 생계 유지에 문제가 없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정규직으로 장기 고용되는 것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면서 사는 '프리터'가 많아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사토리세대와 비견되는 달관세대는 어떠한가? 최근 모신문사에서 달관세대에 대한 기사를 다루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무욕'의 삶을 살며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듯이 조명하여,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사토리세대와 사전적 의미는 같지만, 일본의 최저임금이나 경제구조와 우리나라의 그것은 다르므로, 우리 나라의 달관세대는 '득도'보다는 '포기'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포기하면 편해'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토리세대는 그나마 받쳐주는(?) 경제구조 덕에 나름 '자신의 선택으로 득도한 삶을 사는, 겉보기 패기는 좀 떨어지는 청년군'들이고, 우리나라의 달관세대는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1등만 살아남는 기형적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답없는 삶에 대한 자위로 My Way를 방패 삼아 전진을 포기한 청년군'들이라고, 자조섞인 정의를 내리면 그만인걸까? 이것을 단순히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부정적 방향으로 양산된 젊은 층의 행동양상으로 보고 넘어가면 되는걸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토리세대고 달관세대고 간에,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보여 안타깝다. 사토리세대는 그나마 먹고 살 걱정이 덜하니 행복하고, 자신들의 여가/문화활동이 가능할만큼 시간/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행복한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이 정말 몸과 마음이 편하기만 한 상태면 되는지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행복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에 성공한 시대는 없었다. 시대에 따라 행복이 가져야하는 속성은 조금씩 달랐다. 한 인간으로서 가진 가능성을 다 실현하는 다소 지성적 차원에서 행복을 정의하기도 하고, 욕망의 충족에 근원을 두기도 하고, 도덕적, 종교적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상적인 행복의 속성으로 둔 적도 있다. 현대에는 보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행복을 바라본다.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물질적 차원에서는 행복해지기 힘들고, 마음의 차원에서 현재를 '다시보는' 행위를 통해 시각을 재편하여 행복을 발견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행복의 속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성찰의 성격을 가진게, 행복이다. 그러다보니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성','주관성','내면의 성찰'에 대한 [통제]이다. 행복하려면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상대성), 나만의 길을 가야하고(주관성), 늘 깨어있어 나의 마음이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계하여 마음의 잡음을 덜어내야 한다(내면적 성찰). 유행하는 힐링식 서적이나, 종교나 사상 지도자(특히 불가의 가르침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 주로 불교계 지도자, 뉴에이지 지도자)들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 역시, [마음 다스리기]이다. 맞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일체유심조다. 그래서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행복이니 불행이니도 결정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맞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수행자가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수행자가 되어 영혼의 연마를 위해 살면 세상이 참 아름답겠지만, 아닌건 아닌거다. 아무튼, 이 마음 다스리기의 다소 영성적인 측면을 빼고, 자기계발 계열에서 '행복'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해놓은 공식이 있다. 이것은 꽤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듯 하다.

바로, "행복은 가진 것을 바라는 것으로 나눈 것"이라는 공식이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내가 가진 것(그게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이 바라는 것보다 많으면 대체로 우린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데 갖추어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늘 결핍을 느끼면서 불행해한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적고 가진 것이 많으면 행복지수는 커진다. 가진 것을 많게 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바라는 것을 줄이는 것은 관점 변화와 감사한 마음 내기로 어렵사리 가능하다. 이제 다시 보인다. 사토리세대는 바라는 것을 줄인 세대이다. 그래서 가진 것이 적어도 괜찮다. 달관세대 역시 바라는 것을 줄인 세대이다. 가진 것이 적어도 괜찮다,라고 하기엔, 일본보다 그 가진 것의 가치(단위 화폐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더 가치가 떨어짐)가 적기때문에 일본의 사토리세대보다 우리나라의 달관세대가 더 상황이 안 좋다. 저들은 바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줄인 세대들이다. 그러면 저들의 행복지수는 높아졌을까? 정말 행복할까? 저들이 행복하다면, 저 공식은 맞는 공식일 것이다. 행복이야 주관적이라 자기가 행복하다면 행복한 것이겠지만, '난 행복해'란 말도 일종의 도피일 수 있다. 그리고 소위 '달관세대'라며 인터뷰를 했다는, 기사에 등장한 청년들을 궤뚫고 있는 공통된 정서는 행복이 아니라 '포기하면 편해'에 가까운 차선의 만족이었다. 저 공식은, 맞는 것일까. 저 공식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가진 것'과 '바라는 것'은 결과적 속성을 갖고 있다. 어떤 시점에서 시간을 딱 멈추어 놓고, 고정된 영화 필름의 한 장면을 오려서 들여다 보듯, 한 시점에서의 '내가 가진 것의 리스트','내가 원하는 것의 리스트'를 늘어놓고 비교하는 형국이다. 삶의 한 장면장면을 스크린샷 찍듯 찍어놓고 비교 검토하는 격이다. 하지만, 삶은 멈춘 영화 필름의 컷들을 시간 순으로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삶을 슬라이스하여 해체하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죽은 세포처럼 변한다. 삶은 역동적이며 늘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가고있는 현재진행ing형의 살아있는 행동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매순간이 의미가 있고, 그래서 매순간 가능성이 있다. 삶은 순간순간의 선택과 선택으로 인한 변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A를 하기로 선택하면 B와는 다른 삶의 양상이 펼쳐지며, B를 선택한 후 삶의 가능성을 off, 꺼버린다. 선택은 매순간-지금 이 글을 이 글자까지 읽다가 창을 꺼버리지 않고 계속 읽는 것도 선택-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삶의 단위 시간을 차지한다. 즉, 삶의 속성은 '역동적인 선택과 변화'인데, 저 공식은 죽어 있는 스크린샷을 행복을 측정하는 구성요소로 썼으니,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얼추 맞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삶은 매순간의 선택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변화들로 구성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흔한 말이지 않은가. 삶의 행복은, 내가 얼마나 내 선택을 나답게 하고,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얼마나 기꺼이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감히 정의해본다. 선택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도 있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변화도 있다. 내 선택으로 인한 변화가 외부로 인한 변화보다 강력하다고 느끼면, 행복의 정도가 올라간다. 선택의 자유와, 날 둘러싼 환경에 대한 내 영향력의 문제다. 소위 [행복한 멘토들]의 예를 떠올려보면,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서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 주변 환경이 변화하여 자기가 원하는 환경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창업을 해서 성공을 했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정신적 충만감을 느끼건, 뭐가 되었건 그들은 자기만족을 넘어서서 주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 사회적,개인적 성취를 이룬 멘토까지 가지 않더라도, 행복하다는 긍정감을 가진 이들은 매순간 자신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변화도 긍정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여 헤쳐나간다. 그런 차원에서 사토리세대, 달관세대를 들여다본다면, 그들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는 것을 선택하여 심적 안정을 찾은 반쪽짜리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경쟁적인 환경, 변화를 기꺼이 수용할 수가 없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기엔, 이 사회가 가진 병폐가 너무나도 크다. 그래서 '달관세대를 마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인양' 포장한 모신문사의 기사가 뭇매를 맞는 것이다. 그들은 행복한 세대가 아니라, 분명 반쪽을 포기한 세대이다. 국민 행복 시대 연다고 했던 것, 기억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갈 젊은 세대에게 '달관세대'같은 창조적인 어휘를 갖다 붙일만한 일이 있어선 안되었다. 이런 것에 쓰라고 만든 창조경제니 하는 용어 시리즈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화가 난다. 사토리고 달관이고간에, 그들은 삶의 행복의 반을 접고 들어간 세대이다. 변화를 적극 맞이하며 헤쳐나가기를 거부하기로, 선택'만' 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패기없다고 욕만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동생같고, 나이대는 맞지 않지만 자식같아서 안타깝고 마음 아프다.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변화들을 나다운 방식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커녕 의욕조차 잃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개인의 에너지는 사회의 에너지로 환원될 것이다. 힐링이 대세가 된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방전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힐링이고, 방전된 사람들이 찾게 되는 것이 '이 정도면 되었어'하는 포기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에너자이저가 될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방향과 양은 다를 것이다. 모두 에너자이저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 김미경 강사라면, 에너자이저가 될 필요 없다, 당신의 에너지는 당신만의 것이라 이야기하며 릴렉스시키는 것이 뉴에이지, 불교식 힐링이다. 뭐든 상관없지만, 일부러 포기하는 에너지는 없어야 한다. 무리해서 쓰는 에너지도 없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나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쓰는 것조차 되지 않는다면, 서글픈 일이다. 달관세대, 사토리세대는 정말로 달관하지 않았다. 제발 그들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는 사람들인양 포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다소 평소와 같지 않은 공격적인 느낌으로 적은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울컥했던 것 같다.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 했다. 분노할 것에는, 분노해야 한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55051

** 참고로 정치적인 편향의 의도는 전혀 없다. 실제로 나의 정치성향은 중도다.

*** 선택의 주체성에 대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면, 삶에서의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이라는 관점이 녹아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하다는 주관적 상태를 재단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되려 재단하려고 하는 관점이 행복공식 자체에 녹아있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일정 부분을 포기한 사람들을 행복한 것인양 포장하며 현실의 문제를 '괜찮다'로 어물쩡 넘기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 주된 논조입니다. 필력이 부족하여 의미전달이 어렵네요. 좋은 의견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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