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일을 마쳤어요. 사무실을 나와 번잡한 종로 거리를 걸었죠. 상점들은 등을 켜고 저녁을 함께 보내려는 사람들을 맞으려 두터운 화장을 덧입고 있었어요. 쇼윈도우 너머에는 온화하지만 인공적인 불빛이 가득. 인도는 복잡했지만, 새로 분장한 가게에 눈을 빼앗기며 걷는 일은 세속도시의 즐거움이죠. 얼마쯤 걸었어요. 횡단보도가 나타나고, 멈춰서 신호를 기다렸죠.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이쪽 또는 저쪽으로 비켜 지나가요. 그들도 어디론가 멈추기 위해 달려가는 중. 초록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가방 속에 담긴 책들이 몇 번 들썩거렸죠. 늘 그런 식이에요. 그녀가 사라진 뒤 그는 이제 어떻게 될까. 읽다가 접어둔 책은 항상 그렇게, 이야기를 마저 이어달라고 난리를 치는걸요. 버스에서 또는 지하철에서 책은 그의 다음 삶을 귀뜀해 주겠지요. 그리고 그를 쫓으며 끊임없이 상념에 빠지는 내 자신의 삶도 살짝 곁들여서. 언젠가 나는 교차로에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길 바래왔어요. 그 뿌리는 물론 사춘기에 보았던 어느 책이나 영화였겠죠. 그 뒤로 20년, 나는 정말로 그 누군가를 교차로에서 만나기도 했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했으며 가끔은 내가 그 누군가가 되기도 했어요. 인생이란 알 수 없는 일이죠. 매일매일 드라마가 펼쳐지지만 '드라마틱'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아요. 그리고 드라마틱한 어떤 순간보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한 시간으로 만드는 일이 삶의 본연이기도 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10년이나, 나는 배낭이 아닌 가방을 들고 서울 거리에서 회사원으로 살아온 셈이로군요. 10년은 뽕나무숲이 바다로 변할 정도로 긴 세월이지만 그동안 나는 그다지 변하지 못했어요. 언제나 편한 옷을 좋아하는 것. 가방엔 책 한 권이 들어있고 음악플레이어 따위는 없는 것. 사용하는 볼펜은 언제나 제일 싼 모나미. 머리는 짧고, 수염은 기르지 않으며, 소주는 마시지 못해요. 제일 좋아하는 색은 연두색이지만 심중에 남아있는 깃발은 새빨간 붉은 색. 아니, 어쩌면 나는 10년 동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영화에 열광하게 됐고 재킷 따위는 가능한 입지 않으며, 얼리 어답터에서 벗어났어요. 안경을 벗었고 소설은 읽지 않죠. 풍경에 목말라하면서 사람은 찍지 않아요. 포도주에 빠졌고 수많은 친구를 잃었죠. 또는 버렸거나. 말이 발보다 빠른 사람을 경멸하고, 경멸하는 이들을 폄하하죠. 그것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면서도.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병정처럼 일사 분란하게 차도를 건너가요. 지나가다 보이는 노란색 중앙선은, 어정쩡하게 가운데 서 있으려고 하는 일에 대한 경고, 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러고보니 군대 시절, 늘 그런 말을 듣곤 했죠. 언제나 가운데 있으라고. 너무 잘 할 필요도 없고, 너무 못해서도 안된다. 그걸 제대한 뒤에도 제 삶의 황금율로 삼는 이들로 있지만 그래서야 인생이너무 밋밋해지죠. 나는 감당하려 드는 만큼만 삶이 바뀐다고 믿어요. 건너가지 않으면 저쪽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 발로 걸어야 해요. 중간에 빨간불로 바뀐다 해도 잠깐 뛰면 되죠. 나는 겁이 많지만 그런 건 전혀 무섭지 않아요. 새로운 건 항상 황홀하죠. 진정 새로운 것이 드물뿐. 건너왔어요. 다시금 빨간 신호로 바뀌고, 차들이 불빛을 끌면서 내가 건너온 길을 삼켜버리죠. 괜찮아요. 과거는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몇 개의 표지판만 가지고 지난 궤적을 판정하는 건 타인의 성급과 미숙일 뿐. 이런, 길거리에 면한 식당에서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르네요. 가방 속의 책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요. 흠흠. 저녁이란 회사원의 가장 진귀한 시간. 유혹을 이기고 버스를 타야겠어요. 모두들 종종 거리는 정류장. 기다리는 버스가 바로 오는 법은 드물어요. 인파 속 저 사람은 언젠가 만난 적 있는 지인이로군요. 인사를 건네볼까요. 딱히 할 말도 없는데, 그럴 필요는 없는 걸까요. 버스 한 대가 멈추고 한움큼 승객을 태워요. 그 빈자리 만큼 또 기다리는 사람들이 채워지지요. 그도 버스에 탔는지 어느새 사라졌어요. 아쉬움인지 미련인지가 잠시 머리칼 위로 뿌려지네요. 그리고 몇 개의 전화번호가 손가락 주위를 맴돌아요. H형, K후배, 친구 J, 전에 한 번 만났지만 다시 만나고 픈 K... 집으로 가는 길을 멈추고 이 출렁이는 삶 위에서 그를 호출해 길을 섞어볼까요. 가방에서 책이 다시 들끓고 있어요. 그들은 아는 것이죠. 책의 가장 쎈 라이벌이 사람이란 걸. 무언가를 열렬히 바라고 있노라면 삶이 가끔 멈추는 것 같아요. 단절. 그리고 단절. 어떤 순간이 닥쳐야 비로소 그 멈춘 삶이 다시 이어지는 것 같은 환상. 그 어리석음. 나는 지금 교차로에 있어요. 몇 대의 버스를 놓치면서. 다른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래요. 지금.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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