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눈물과 닮은 것은 소주이다.
비가 처연히 내리는 날,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 잔을 들며 승은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투명한 유리잔에 찰랑거리는 소주을 보고 있으면, 기쁘고, 슬프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또 환해 진다. 오래전, 아직까지 잊을수 없는 그날부터 그렇다.
술을 처음 가르쳐주고, 사랑을 처음 가르쳐 준 한 여자가 승을 떠났을 때부터 술은 귀한 그리움이 되었다.
"이유가 많아서 좋기도 하겠다. 그렇게 마시는 걸 보면 너는 다른 것 없고, 이미 중독일 뿐이야"
바로 얼마전 묘가 말을 했다. 그리고
"제발 술은 끊어 볼려고 생각해. 정말 술을 마음의 슬픔을 몸에 고통으로 여과해주는 것이라 믿고 있는 거야?"
이렇게 나무랬다. 묘와는 같은 모임의 인터넷 카페에서 만났다. 이별로 정말 자신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마음의 공백을 메워 줄 어떤 것이라도 찾고 있던 두 사람이였다.
비록 묘가 승보다 아홉살 많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자기가 지켜온 어떤 우정보다도 더 마음에 맞는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일까, 둘에게 9라는 숫자는, 조금 더 좋아하고 어떤 틈도 만들지 않는 완벽한 숫자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7시, 이제 곧 묘에게 전화가 온다. 승은 생각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나는 묘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을까.
승이 묘에게 좋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때, 묘는 까르르 웃었다.
"단지, 솔직한 것 뿐이야"
그런 말을 했다. 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묘의 휴대전화에는 명주실로 짠 스트랩이 달려있다.
밤공기처럼 차가운 블루 색상의 스트랩.
"직접 만들었어?"
언젠가 승이 묻자, 묘는 믿기지 않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만의 시간이 많다고 느껴졌을 때 만든거야, 라고 했다.
그 말을 할때 묘의 눈빛은 푸르게 빛났다고 승은 기억한다.
혼자만의 시간. 그건 아마도 이별 뒤에 찾아온 시간일 것이다. 그 전까지의 홀로 있던 시간은 사람들은 결코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7시 30분. 빈 소주병이 금새 늘어났다. 전화벨은 아직 울리지 않는다. 승은 습관처럼 또 술잔을 비운다. 승에게 술은 맛도 멋도 아닌 오직 취하기 위한 것 뿐이다. 정갈한 과일에 먹는 소주는 그 어떤 음식보다 깔끔하다. 승은 과일에 소주를 좋아한다.
좋아하다는 게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995년 10월, 승은 이별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사랑이 외 좋아하는게 있었다면, 승은 죽을 결심으로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살아 돌아 왔다지만, 승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우울함을 안고 왔다. 이후, 승은 술과 함께 살게 되었다.
묘를 처음 본 건, 4년 전 묘가 스무살 때 카페 모임의 술자리에서이다.
"웃고 삽시다."
묘는 여러사람에게 당차게 짧은 말로 인사를 했다. 거기있던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었다. 날씬한 팔다리에 풍성한 검은머리, 흰블라우스에 짙은 감색스커트를 입은 묘한 매력의 여자였다. 묘는 승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승은 묘를 보며 눈과 입이 아늑한, 편안한 외모로 느꼈다.
"이렇게 뵙게되네요."
묘는 승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정말 가슴 속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 같네" 라고 했다. 은사시나무, 카페의 나의 아이디를 두고 한 말이겠지만 승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대학생?"
네, 라고 대답한 승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쩐지 언짢게 울려퍼진 것을 기억한다.
2년째 접어든 대학생활은 따분함 자체여서, 요즘 승은 수업에도 잘 나지 않는다. 출결 사항을 엄격하게 따지는 교수이면서 강의까지 따분하면 머리 속은 온통 술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이제껏 성실히 살아왔으니까, 한 1학기 정도는 시간만큼은 내 멋대로 해도 상관없겠지 생각하며, 승은 술에 매달려 있었다.
8시. 어느새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고 승은 생각한다. 매일 마시는 술은, 그만큼의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다.
계산을 할려고 지갑을 여는데, 드르르, 핸드폰이 진동한다. 묘의 전화다. 승의 수화기 너머로, 네에, 하고 말꼬리에 여운을 남기며 전화를 받는 묘의 기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술마시겠지?"
네, 하고 승은 또 대답한다. 그리고 묘의 기운을 귀로부터 온몸이 들뜰 정도로 느낀다. 언제나 생각해도 묘의 목소리와 말엔 승을 기쁘고, 집중하게 끔하는 매력이 있다. 승은 말한다.
"묻고 싶은게 있는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승은 술잔을 타고 하루 종일 머리 속을 배회하던 궁금증을 묘에게 묻고 싶었다.
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나이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지냈지만, 묘에게 승은 자신이 살지 못한 삼분의 일의 인생을 더 살았다고, 은연 중에 인식하고 기대었다. 묘가 승에게 저보다 나은 참신함이 있다고 기대듯이.
"스무살로 돌아간다면, 어떨 것 같아?"
승은 아주머니께 소주 한 병만을 더 마시고 가겠다며 검지손가락 만을 치켜 들며, 물었다. 벌써 두 병이나 마셨지만, 승의 전화를 끊고 곧장 집으로 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묘는 승의 질문 속에 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다.
"너의 질문을 알겠어,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아"
승은 휴대전화를 더욱 깊숙히 귀에 가져다 댄다. 단순히 예전으로 돌아갈수 있다면, 이별이 있고, 그리고 후회가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좋아 할줄 알았는데, 묘는 아니라니, 승은 목 넘기던 소주가 달다는것도 깨달을 새 없이 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지난 날보다 더 열심 살아도, 더 많은 것을 주며 사랑해도 다시 지금에 오면 후회하긴 마찬가지 일거야"
승은 수화기 너머 흘러오는 목소리를 느끼며, 묘의 눈빛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승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건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낫다는 사실이지"
묘의 말이 승의 가슴 속에서 달그락 달그락 굴러 다닌다. 승은 다시 안주 없이 소주를 삼킨다. 묘는 그런 승을 마치 수화기 너머 보고 있는듯 한숨 섞여 말 한다.
"어째든 곰돌아"
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우직하고, 미련하다며 승을 가끔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승은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마음 속으론 자꾸만 곰처럼 묘에게 애교를 피우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야 했다.
승은 스스로 어쩔수 없는 나는 막내야, 라고 생각한다.
"왜?"
퉁명스레 들려야 한다고 승은 짧게 말했다. 묘는 미소가 섞인 묘한 목소리로
"벌써 취한게냐?"
하고 묻는다. 승은 다시 잔에 소주를 따르고,
"절반쯤"
이라고 대답한다. 묘은 다시,
"이번 주말에 나올수 있어?"
하고 묻는데, 승은 그 목소리가 참 곱다고 생각한다.
"그럼, 기다릴꺼야"
전화기 너머 묘의 미소가 번진듯, 승에게도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플라니에서."
라는 말에 이어, 늘 그렇듯 싱겁게 전화를 끊고, 승은 휴대전화를 한 손에 꼭 쥔 채, 따라놓은 잔을 마저 비우고 술 자리에서 일어선다.
밖에는 아직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은 포장마차가 있는 이 거리에 어딘가 있는 레코드 가게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달콤하고, 촉촉하면서도 가볍고 유쾌한 보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깨에 젖어드는 한기를 느끼며.
얼마쯤 걸어가자, 취기가 올라온다. 승은 하릴없이 주위를 둘러본다. 분위기 좋아 보이는 식당에 앞의 작은 흑판에 쓰여진, 직접만든 데미그라소스 오무라이스를 드셔보세요, 를 읽는 순간 공복을 느낀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승은 그저 술만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일까, 웃는 법을 잃고, 식욕마저 잃어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술 만으로 버티게 되었을까.
승은 비에 젖을수록 빛나는 은사시나무 생각하며, 의식이 감정의 밑 바닥으로 자꾸만 내려가도 신경쓰지 않고, 가을바람이 스며드는 가슴에 담배 불을 붙였다.
비가 더욱 내리자,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이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고 가던 사람들은 빗속으로 홀로 걸어가는 승을 비웃는듯 했다.
-은사시나무, 2005년 1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