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오늘은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 머리를 깎았다. 미용실에 들어갔을 때는 먼저 커트를 하고 있는 남자손님이 있었는데 그와 여자미용사는 쉴새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여성과 둘이서만 있는 공간에서는 완전히 얼어버리는 편이라 '아, 나도 저렇게 해야하나, 뭔가 얘깃거리를 준비해야겠다'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손님 차례가 끝나고 내가 보자기를 덮어쓰고 미용 의자에 앉자 미용사분은 '어떻게 깎아드릴까요?'라고 물었고, 내가 '더우니까 조금 짧게요'라고 대답하곤 그후로 대화는 없었다. 난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다. 그와 미용사는 친한 단골 사이였던 것일까 아니면 나같은 뜨내기 손님은 미용사에게 그저 짐이었던 것일까. 커트 직후,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더없이 홀가분한 기분이었지만 별스런 의문이 남는다. 나는 말 같은 건 걸고 싶지 않은 손님일까? 내가 너무 무섭게 보였나? 괜히 그 미용실을 간 걸까? 소심함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든다. **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소설을 읽고 있다. 그의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뒤흔들어 놓은 상대가 먼데서 돌아오겠다는 기별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주인공은 그로 인해 나부꼈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독자에게 암시한다. 굉장한 일이 생길 거라고. 산도르 마라이의 대단한 점은 결정적인 주제를 암시하는 유려한 문장이나 삶의 비의를 드러내는 덤덤하지만 날카로운 묘사에서 도드라지는 게 아니라 굉장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암시를 미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파국을 맞았을 때 그 암시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만큼 생생하고 절절하게 사건을 만들어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사건'은 온전하게 심리적인 측면에서만 사건이라는 점도 탁월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그 긴장이 지나쳐 읽는 도중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는 적도 더러 있었다. 좋은 소설은 언제나 그 즉시 현실에 끼어든다. 결코 종이 속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진짜 이야기는 우리 삶을 실제로 뒤흔든다. 산도르 마라이는 '불멸'한다. *** K와 만났다. 몇 권의 책과 칼럼으로 알게모르게 쌓은 선입관과는 다르게 그는 푸근했으며 자상했다. 서로 낯을 가리는 어색한 자리였는데도 이래저래 그가 끝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는 게 고맙고도 미안하다. 일에서 인연이 있어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었지만 내가 궁금한 것들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독자로서, 그리고 한때는 동년배의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서글픈 90년대와 참혹한 2010년대 중반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시민으로서의 궁금증이었다. 졸업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환멸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여행을 동반하는 인생의 닻은 어떤 것인지 나는 무척 궁금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열렬히 추구했으나 반향을 얻지 못했던 질문이기도 했으므로. 그는 대답했으나 처음 만난 자리의 특성상 그 대화가 충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진하고 아쉽다. **** 여름이다. 저녁이 내리는 야외 탁자에서 식힌 포도주를 마시기에 좋은 계절. 나는 아직 답장을 받지 않은 몇 건의 소식을 기다린다. 삶은 응답이 가능한 무엇일까?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해답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애니 딜러드가 말했듯, 게으르지도, 쉬지도 말라.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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