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컴플렉스

외모 컴플렉스?

우리나라는 성형강국이다. 손재주로 연결되는 젓가락 문화를 찬양하며 그 성형기술에 감탄해야 할지, 성형이 범람할만큼 외모지상주의가 극에 달한 것에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실은 그러하다. 컴플렉스 중에서도 흔한 '외모 컴플렉스'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여성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외모로 인해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이기에, 외모 컴플렉스 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외모 컴플렉스로 인해 고민이 된다는 글, 극복하기 위해 많이 웃고 자기를 사랑하라는 조언, 연예인들의 외모 컴플렉스 언급 기사, 성형외과 광고 등이 검색 결과 화면에 나타났다. 열등감 극복, 자존감 회복, 각종 컴플렉스 극복을 위한 키워드로 늘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의 검색결과에도 역시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세요'라는 처방전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자존감이 낮으니 자존감을 올리자'라고 되새기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자신에게 맞게 찾아내는 것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첫걸음 - http://www.vingle.net/posts/717764)이 더 와닿는지라, 외모 컴플렉스에 대해서도 무슨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자존감을 툭 던져주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정답인건 알지만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계 평화가 중요한건 알지만 인류가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듯이,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하늘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외모 컴플렉스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혹시 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외모 컴플렉스를 뜯어보기로 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

잘생긴/예쁜 외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것에는 객관적인 '등급표'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취향의 영역이지만 어느 정도는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어느 정도'를 정하는 것이 정말 '나'라고 생각하는가?

잠시 '자크 라캉' 아저씨를 소환해본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현대의 헤겔이라 불리우는 라캉은,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정의하였다. 난해하기도 하고, 관점이 달라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라캉식 어려움을 최대한 배제하고 내가 이해한 선에서 쉽게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라캉은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철저히 구분하였다. '욕구'하면 떠오르는 단어와 '욕망'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단어들 간의 차이는 어떠한가? 나의 경우는, '욕구'하면 식욕, 성욕, 사랑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 생존을 위한 생리적 욕구나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한 애정을 채우려는 욕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번 발생하고, 무언가로 채워지면 사그라들 수 있다. 물론 필요해지면 또 나타난다. 그래서 need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면서도 즉각적인 느낌을 받는다.

반면 '욕망'은 보다 절실하고, 더 결핍되어 있고,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주는 단어로 다가온다. 탐하는, 갈망하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된, 병적으로 추구하는 상태의 욕구 등의 말들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욕구보다 욕망을 보다 끈적한 무언가,로 느낄 것이라 여긴다.

라캉은, 이 욕망은 자기의 것이 아닌 타자의 것이라고 했다. 아이가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엄마의 욕망에 맞게 움직인다면, 그 아이의 욕망은 자기의 것일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개인이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의 속성 자체가 문제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언어학의 철학적 부분을 가져왔다. 내가 코끼리를 코끼리라 부르는 것은 언어적 약속에 의한 것이다. '코끼리'는 진짜 코끼리를 상징적으로 가리키긴 하지만, 그 실재를 담아낼 수는 없다. 내가 떠올리는 코끼리와 엄마가 떠올리는 코끼리는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언어는 그저 상징체계일 뿐이다. 인간이 욕구를 표현하고 채우기 위해 써야하는 언어 자체도 자기의 것이 아니라 소통 과정에서 '나'는 흐려진다. 내가 그 '언어'를 통해 던진 말은 상대의 상징 속에서 이해되고 분해되어 그의 생각이 덧입혀져서 나에게 반응으로 돌아온다. 그릐고 난 그것에 또 반응하여 나의 욕구를 투영한다. 내 욕망은 그 자체로 순수히 나의 것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체계의 영향을 받고, 상대방이 보이는 피드백에도 영향을 받아 '내 것'이라고 하기 모호한 형태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온전한 하나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아 변해가는 무언가가 있을 뿐이다. 애정을 주지 않는 엄마가 양육한 아이의 욕망은, 애타게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로 인해' 생긴 욕망이다. 온전히 나 혼자서 발생시키는 욕망이란 없다. 때로는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마의 욕망을 내 욕망처럼 여기고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개인의 욕망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타자의 욕망'이다. 그래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표현한다. 타자의 욕망이기에, 그 욕망은 '채워질 수가' 없다. 그것을 욕망하는 타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쁜 가죽을 갖고 싶은 욕망

이것이 외모 컴플렉스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예뻐지고 싶은 욕망,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말 '나'에게서만 비롯된 것인지를 라캉의 관점을 빌어서 본다면, 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쉽게 말하면, '이러이러한 것이 이쁘다/잘생겼다'라고 하는 타자들이 있기에 내가 그걸 욕망한다는 것이다. 김태희가 이쁜 이유는 무엇인가? 다들 이쁘다고 하기 때문에 이쁜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 세계에서는 그들 세계의 미녀가 이쁘다. 그곳의 타자들은 김태희를 욕망하지 않고 원주민 미녀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명품백을 욕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쁘고 품질이 좋아서? 남들이 명품백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나도 그걸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명품백을 욕망하지 않는 시골 마을에 살거나,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명품백을 계속 욕망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의 욕망이 사라짐) 그럼 명품백에 대한 내 욕망은 허상인게 아닐까? 남들이 좋아하면 나도 원하고, 남들이 관심 없어하면 나도 흥미를 잃는다면, 그 욕망은 내 것일까?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욕망일까? 외모 컴플렉스의 뿌리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의 욕망,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하고 따르고자 하는 표상이 있다. 저것(잘난 외모)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찬양한다. 저것을 가진 이들은 더욱 사랑받는다. 나 역시 저것을 갖고 싶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외모의 우열은 없다. 다수의 선호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수가 욕망하는 것이 곧 내 욕망이 되어버리기에(그리고 그 욕망을 성취하면 현실적으로 긍정적 피드백을 받기에) '나'의 절실함은 더욱 커진다.

부모 ・ 영아(2세미만부모) ・ 유아(2~4세부모) ・ 웹툰
지구별 여행자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