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용불패. 임창용

창용불패. 임창용 1976년 6월 4일 출생 20대엔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중무리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구위로 상대 타자를 농락하며 진필중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였고, 30대엔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본 무대에서 수호신으로 활약하며 선동열을 뛰어넘었으며, 서른 일곱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그리고 한-일 통산 300세이브, 또한 김용수에 이어 프로 통산 두 번째로 100승 200세이브 달성하며서 프로 야구 역사의 한 획을 긋다. 올해 그의 나이 불혹, 창용불패는 계속된다.

놀기 좋아하던 게으른 천재 때는 바야흐로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생 임창용은 170cm도 채 안 되는 키에 전력 투구를 해도 130km를 넘지 못하는 평범한 언더핸드 투수였습니다. 하지만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키가 자랐고 체중도 불게되는데요. 여기에 팔의 각도를 올리면서 사이드암으로 공을 던지니 130km도 채 안되던 직구 구속이 144km까지 나왔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의 가능성을 본 눈 여겨 본 해태 타이거즈는 그 해 겨울 임창용을 팀에 입단 시킵니다. 해태의 입단이 확정된 1994년 겨울, 팀 선수들은 시즌이 끝나고 휴식을 취했지만 신인 선수들은 구장에 나와 훈련을 해야 했는데요. 하지만 20살도 안 된 아직 어린 나이의 선수는 야구도 좋았지만 노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해태의 2군 감독이 훈련을 땡땡이 치던 한 임창용을 불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짐 싸서 집에 돌아가.” 당황한 임창용은 그날 저녁 감독을 찾아가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을 하죠. “딱 1년만 참고 나랑 야구하자.” 그렇게 임창용은 그 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야구에만 열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오늘의 임창용을 있게 한 이 감독, 바로 현재 한화 이글스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야신’ 김성근 감독입니다.

선동열의 공백을 지우다 김성근 감독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임창용은 입단 후 이듬해인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시작합니다.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150km가 넘는 뱀직구를 뿌려대며 타자들을 농락시키며 임창용은 1997년 14승 8패, 26세이브를 기록하며 선동열이 떠난 해태의 마무리 공백을 지워버렸습니다. 특히 이 시대까지만 해도 아직 1이닝 마무리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창용은 선발이면 선발, 때론 3이닝 이상을 책임지는 중무리를 맡으며 팀을 이끌었는데요. 1998년엔 34세이브를 기록하며 구원왕에 올랐고 더 놀라운 건 100이닝 이상을 투구하며 1점 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임창용을 마지막으로 1점 대 평균자책점은 2010년이 되어서야 류현진이 기록을 했고, 또한 임창용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는데, 이후 해태와 기아에서 2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2007년 한기주가 25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임창용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애니콜이 된 창용불패 1999년, 투수 기근에 시달리던 삼성 라이온즈는 임창용 한 명을 얻기 위해 삼성은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 현금 20억을 더하는 조건으로 트레이드를 성사시킵니다. 해태가 IMF로 당시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트레이드였죠. 삼성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임창용은 팀의 기대에 부응했고 38세이브를 올리며 2년 연속 구원왕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정이닝을 채우며 138이닝을 투구하면서 ‘애니콜’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이때 얻게 됩니다. 물론 해태에서도 노예 생활을 안 한 건 아니지만요. 참고로 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의 한 시즌 평균 소화 이닝은 50~60이닝 정도이니 그야말로 혹사 아닌 혹사였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임창용은 ‘창용불패’라는 별명으로 두산의 진필중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의 마무리 투수를 양분하는 쌍두마차였습니다. 2001년엔 선발 투수로 전향한 임창용은 이 해와 이듬해 각각 14승과 17승을 올리며 단번에 팀 내 최다승을 올렸고 2002년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엔 메이저리그 진출도 시도했으나 포스팅 응찰액이 65만 달러에 그치며 팀의 반대로 해외 진출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국내 잔류를 선택한 임창용은 2004년엔 다시 마무리투수로 보직을 전환해 36세이브를 올리며 자신의 세 번째 구원왕 타이틀을 수상합니다. 선발 투수로 나서면 10승 이상, 마무리 투수로 나가면 20세이브 이상을 올려줄 수 있는 그야말로 한국 프로야구 최고 선수 중 한 명이었죠. 하지만 데뷔 후부터 계속된 혹사로 인해 쌓여왔던 팔꿈치에 이상이 생기며 임창용은 2005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을 받고 다시 마운드에 복귀했지만 그는 더이상 예전의 임창용이 아니었습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이 기간은 임창용의 야구 인생의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기간 동안 평균 자책점이 프로 데뷔 시즌을 빼고는 한번도 기록하지 않았던 5점 대였죠. 부상으로 인해 예전 같은 강속구를 던지지 못하며 마무리 자리는 후배 오승환에 내줬고 선발로도 뛰기 힘든 구위였습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수호신으로 거듭나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조용히 임창용은 일본 진출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현장에서 임창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선수로서 임창용의 생명은 끝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일본 진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임창용은 일본 진출 첫 해부터 보란 듯이 그 편견을 깨버렸습니다. 데뷔 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이승엽으로부터 첫 탈삼진을 빼앗으며 성공적으로 일본 무대에 연착륙한 임창용은 2008년 1승 5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합니다. 그 비결은 지난 2005년 받았던 팔꿈치 수술 이후 줄어들었던 구속을 회복했기 때문인데요. 이듬해인 2009년엔 최고 구속 160km를 기록하며 전성기보다 더 빠른 공을 뿌려댑니다. 개막전부터 7월까지 단 한 점의 자책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무패행진을 벌인 임창용은 시즌 최종 5승 4패 28세이브 5홀드, 2.0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2010년엔 35세이브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한 임창용은 시즌 종료 후 3년간 15억 엔의 초대형 계약을 맺으며 야쿠르트에 잔류합니다. 2008년 3000만 엔에 불과했던 연봉은 3년 만에 약 17배가 뛰었습니다. 재계약 후 첫 해인 2011년,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98세이브를 뛰어넘음과 동시에 일본 리그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했고 4승 2패 32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2.20을 기록했습니다.

서른 일곱에 이룬 메이저리거의 꿈 하지만 임창용은 2012년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 두 번째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야쿠르트의 수호신으로 활약하며 128세이브를 올렸지만 수술로 인해 시즌을 날렸고, 시즌 종료 후 야쿠르트는 임창용의 방출을 결정합니다. 방출 이후 새로운 팀을 모색하던 임창용은 다른 일본 팀으로도 갈 수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바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바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서는 것이었죠. 메이저리그 팀인 시카고 컵스와 최대 500만 달러에 계약하며 메이저리거 꿈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2013년 재활을 거쳐 마이너리그에 등판을 시작한 임창용은 마침내 9월 4일 메이저리그로 승격되며 이상훈,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에 이어 한국, 일본, 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다5번째 투수이자 지난 1994년 박찬호를 시작으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14번째 선수가 되었습니다. 시즌 최종 성적은 6경기에 등판해 5이닝을 투구하며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팀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했으나 결국 25인 로스터 진입에 실패하면서 지난 4월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불혹에도 창용불패는 계속된다 지난 시즌 중간 삼성에 복귀한 임창용은 2군 무대에서 복귀 준비 과정을 거친 뒤 오승환이 떠난 마무리 투수 자리를 맡습니다. 5월 4일엔 NC 다이노스와 경기에 등판해 한-일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했는데요. 하지만 시즌이 지날수록 체력적인 문제를 노출하며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는 횟수가 늘어났지만, 류중일 감독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임창용을 계속 마무리로 기용했습니다. 올 시즌엔 3월 31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세이브를 기록하며 프로 통산 두 번째로 100승 200세이브의 위업을 달성하면서 또 다시 한 번 프로 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올해 그의 나이는 어느덧 불혹을 맞았습니다. 예전같이 매일 등판해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구위는 이젠 기대할 수 없지만, 여전히 임창용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가장 확실한 마무리 투수이자 살아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중 한 명입니다. 몇 살이 되었건, 몇 번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건, 그건 임창용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동안의 그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이 다하는 날까지 마운드에서 역투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사진 출처: 삼성 라이온즈, 일간 스포츠, 중앙 일보, 영남 일보, 스포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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