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이충렬(김영사)에서 발췌

 간송은 재벌가의 아들 전형필은 1906년 7월 29일 대대로 내려오는 무반 집안의 늦둥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전창엽은 큰 상권을 갖고 계셨고, 둘째 할아버지 전창렬은 무과 종2품 가선대부로 계셨는데 대를 이를 손주가 없자 전형필을 양손자로 맞았다. 아버지 전영기는 무관을 지내다 종로에서 몇 대째 운영해온 미곡상을 운영하셨다. 당시 조선은 군비를 제대로 조달해 주지 못해서 무관에게 장사를 허락하고 대신 군비를 충당시켰다. 때문에 대대로 무관을 지낸 전형필의 선조들은 미곡상을 운영하여 큰 돈을 모았다. 그런데 전형필이 휘문보고를 다닐 때 집안의 어른들이 차례로 운명을 달리하셨다.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양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죽었다. 전형필 24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전형필은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 두 집안의 상속자가 되었다. 두 집안이 남긴 토지는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창동에서부터 경기도 고양군, 양주군, 광주군, 황해도의 연안, 연백, 충청도의 공주, 서산까지 800만평에 달했다. 해마다 800만평의 논에서 2만 석(450억)의 쌀을 수확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매년 1백만 석 이상 쌀을 수학하는 사람은 43명뿐이었다고 하니 2백만 석을 수확한 전형필은 지금으로 말하면 10대 재벌가쯤 되었을 것이다. 24살의 젊은 전형필은 이 많은 재산을 어떻게 지키고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깊었다. ​ 스승 오세창과 지인들 전형필은 12살 때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효제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6세에 휘문보고에 입학했다. 청소년기에 외사촌형 월탄 박종화의 영향으로 총독부가 금지하는 '동국사략', '대한역사' 등 우리 역사책을 탐독했고 '연려실기술', '동국통감' 등 옛책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민족과 역사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외숙부 박대혁은 전형필의 독서열을 기특하게 여겨 옛책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아버지 전영기는 책을 가까이 하는 전형필에게 '옥정연재'라는 서재를 만들어 주었다. 그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와세다 대학교 법학대학에 입학했으나 전형필은 일본 법에 얽매인 변호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진로를 고민하는 전형필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화가 고희동으로부터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돼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리고 고희동의 소개로 당시 64세인 오세창(오경석의 아들, 대한민보 사장,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오경석으로부터 많은 수장품을 물려받음. 서화 감식의 최고의 권위자 )을 만났다. 전형필의 사람됨이 마음에 들었던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란 뜻이 담긴 '간송'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재산을 어떻게 지키고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많던 간송은 오세창을 찾아가 민족의 혼과 얽을 지키는 방법으로 서화와 서책, 골동품을 모으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도움을 받는다. 전형필이 기특한 오세창은 자신이 직접 만들고 귀하게 여기던 서예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과 화첩 [근역화휘]을 주어 안목을 넓혀 주고 이끌어 주었다. 또한 오세창은 조선 독립을 확신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재를 스스로 지겠다는 전형필을 격려하였다.​ 가치 있는 고서를 많이 수장하고 있는 백두용은 재정 문제로 한남서림을 처분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평생 모으고 아끼는 책이 여기저기 흩어지거나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던 백두용은 한남서림을 전형필이 인수해 주기를 기다렸다. 한남서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전형필은 후한 조건으로 한남서림과 백두용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서책을 일괄 인수했다. 백두용은 소장한 책 중에 훈민정음 편찬 당시 한자음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연구한 '동국정운' 1권과 6권을 전해주며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에 대해 완성된 책이 있다고 했으니 전형필이 그 책을 꼭 찾았으면 하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미곡상 운영도 바쁜 전형필은 한남서림을 직접 운영하는 일이 벅차게 되었다. 그래서 오세창이 소개한 거간 이순황을 만나 한남서림의 운영을 넘기고 자신의 전담 거간으로 삼았다. 이후 전형필은 많은 수장품을 이순황을 통해 거래하였다. 또 이순황이 잘 모르는 분야인 고려자기의 구입을 위해 믿을만한 청자 전문 거간 일본인 신보 기조도 파트너로 삼아 도자기, 석탑,석등 등을 구입했다. ​ ​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박물관을 세우다 간송이 많은 수장품을 모으자 오세창은 수장품을 모으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지키는 일임을 일러둔다. 그동안 많은 수장가들이 오랜 세월동안 그들이 애써 모은 수장품을 경제적인 문제로 본인이나 또는 자손들에 의해 잃었던 일이 다반사임을 일깨워 주었다. 간송은 후세에도 수장품이 흩어지지 않고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사설 박물관을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박물관은 일제가 경복궁 안에 지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고종을 폐위시키고 위로한다고 만든 창경궁의 이왕가 박물관 그리고 경주와 부여에 총독부박물관 분관이 전부였다. 간송은 성북동에 박물관 터를 마련하고 박물관의 설계와 건축은 조선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화신백화점, 인사동의 민가다헌, 마로니에공원의 한국 문화예술 위원회 건물)에게 의뢰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고 진열실 바닥에는 쪽나무 판자를 이어 깔았으며 진열장도 최고급으로 주문하였다. 박물관은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38년 8월 '보화각'이란 이름으로 완공되었다. 오세창은 어린 나이의 전형필이 진정한 수집가이고 애국자라 극찬하며 그가 세운 박물관이 개인의 것이기에 앞서 우리 민족의 박물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많은 부자 수집가가 있었지만 박물관을 만들어 수장품을 보관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 의미가 매우 컸다. 보화각은 1971년에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뀐다. 간송은 그동안 모아온 수장품을 보화각에 진열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갈수록 심해져 외부에는 절대 알리지 않았다. 간송은 오세창의 가르침대로 '서화 골동에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수집에 재산을 탕진한다는 비웃음을 자초하며 총독부의 헌금 시달림에서 벗어났다. 당시 갑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금광에 투자하는 황금광시대였지만 전형필은 조국이 독립되리란 확신을 갖고 혼자서 묵묵히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지켜나갔다. ​ 간송이 지켜낸 문화재 ​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 첫 수집품으로 백두용이 운영하는 한남서림에서 구입했다. 당시 겸재 정선의 그림은 지금처럼 높이 평가되지 않았으나 오세창과 간송은 진경산수화의 선구자 겸재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간송은 겸재의 작품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집하여 국립중앙박물관보다 40점이 많은 161점이나 모았다. 아깝다! 몽유도원도 - 간송은 오봉빈(안창호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룬 후 조선미술관을 차리고 여러 차례 조선 고서화 기획전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전시기획자)으로부터 일본으로 유출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3만원에(약 90억~100억)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간송이 당장 그 큰 돈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오봉빈은 일제로부터 몽유도원도를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몽유도원도를 조선 사람이 꼭 샀으면 좋겠다는 급박한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실었다. 그러나 사겠다는 조선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결국 일본 덴리 대학의 수장품이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놓친 일은 전형필과 스승 오세창. 그리고 오봉빈에게 모두 깊은 상처가 되었다. 간송은 이후 귀중한 문화재가 나타나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재빨리 사게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놓친 일은 간송의 나이 26세 때 겪은 뼈아픈 경험이 되었다.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 일제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도굴이 성행했는데 일본인 전문 도굴군와 조선인 인부로 이루어졌다. 주로 개경과 강화도 고분 도굴했는데 신라의 무덤은 그 내부가 돌로 덮여 있는 반면 고려시대 왕이나 귀족의 무덤은 돌로 덮지 않아서 탐침봉을 넣어 도굴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도굴군 야마모토는 강화도에 있는 고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묘에서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를 도굴하여 거간 스즈키 다케오에게 1000원(기와집 한 채 값)에 팔았다. 스즈키는 다른 거간에게 1500원 넘겼고 그것을 대구의 수집가 치과의사 신창제가 4000원 수집했다.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은 다시 경성 대화정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치에게 6000원에 넘어갔고, 총독부에서는 마에다에게 1만원에 거래를 요청하였다. 마에다는 총독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2만원을 불렀는데 전형필이 2만원(60억~80억)을 내고 마에다로부터 구입하였다. 그후 상감 청자 운학문 매병을 탐내는 일본인 수장가 무라카미가 4만원을 주겠다고 간송에게 제의했으나 간송은 정중히 거절하였다. ​ 겸재 화첩 '경교명승첩' - 겸재가 그려 보낸 그림을 벗인 이방연이 모아 화첩으로 만든 것으로 33폭의 화폭마다 천금물전(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의 인장이 찍혀 있다. 화첩에는 '압구정' '녹운탄' '동백탄' '행호관어' '목면조돈' '장안연우-안개비 내리는 서울' 등 서울을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진경산수화가 가득하였다. (압구정의 어원: 한명회가 정계에서 물러나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 이름하였다. 친할 압, 갈매기 구,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시나 짓겠다 의미) 겸재의 화첩을 구입한 간송은 이어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쉼터를 그린 대작 '청풍계'도 구입하였다. 겸재의 '해약전신첩'- 거간 장형수는 용인에서 고서화를 찾고 있던 중 친일파 손병준의 집에서 불소시개로 쓰려고 내놓은 겸재의 화첩을 발견하였다. 장형수는 20원에 산 겸재의 화첩을 간송에게 200원을 달라고 청하였으나 간송은 장형수에게 1500원을 주었다. 불속에서 겸재의 작품을 구한 공을 생각해서 후하게 계산한 것이다. 이 그림이 겸재 나이 72세 때 그린 대표작 '해약전신첩'이다. 신라시대 3층 석탑 :1933년 이순황과 신보 기조가 일본으로 건너가 경매로 나온 통일신라석탑을 6천원에 낙찰 받았다.(나중에 고려 석탑으로 판명.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8호). 그밖에도 고려3층 석탑은 3700원, 석조 사자탑 2500원, 조선시대의 석등 550원 등 모두 14000원에 낙찰 받았다. 신유복의 화첩 '혜원전신첩'- 오사카에 신유복의 풍속화첩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은 간송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골동품 상인 야마나카가 5만원을 요구하는 것을 2만5천원(75억)에 구입했다. 이 화첩은 미인도, 월하정인, 기방난투 등이 들어있는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 혜원전신첩으로 국보 135호로 지정되었다. ​ 신윤복의 미인도: 사대부 김용진의 부탁으로 비밀리에 구입했다. ​ 심사정의 '촉잔도' - 영조 44년에 8월, 심사정이 62세 때 그린 그림으로 8m의 두루마리 화폭에 그려진 그림이다. 문광서림에 통해 5000원에 구입했는데 그림이 낡고 훼손이 심해서 교토 수리복원 전문 표구집에서 6000원을 지불하였다. 결국 총 1만 1천원에 수장하게 된 작품이다. 괴산 팔각당형 부도- 숭유억불로 주인을 잃은 신라와 고려시대 사찰은 건물은 불타 없어졌어도 탑과 부도가 전국 곳곳에 남아 있었다. 농부 김준형이 옛 절터에서 불법으로 부도를 옮겨 배성관에게 350원에 팔았다. 배성관은 다시 골동품상 다케우치 야오타로에게 2700원에 팔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황은 간송에게 알리고 1만 2000원에 흥정하여 밀반출하기 일보직전에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전형필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문화재 밀반출 협의로 3년간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 일본인 금융가 모리 고이치는 청자보다 가격이 싼 백자를 수집하였다. 그가 죽자 유족들은 그의 유품 200점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간송은 직접 경매에 참석하여 야마나카토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백자로서는 최고가인 1만5천원에 낙찰 받았다. 국보 제294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 영국인 존 개스비는 일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20년 넘게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그는 가토가 소장한 '청자 상감 연지원앙문 정병'을 구경한 후 그것을 잊지 못해 2년 동안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가토가 팔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떼쓰듯이 졸라 2만5천원에 구입하였다. 1937년, 일본 정세의 불안함을 느낀 개스비가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그동안 모았던 명품 청자 22점의 수장품을 처분하려 하였다. 개스비가 수장한 고려청자를 되찾고 싶던 간송은 인생 최대의 승부수를 건다. 개스비가 제시한 금액은 55만원이고 전형필이 제시한 가격은35만원. 여러 차례의 협상과 결렬을 거듭한 후 전형필의 수집 목적이 조상들의 문화재를 지키겠다는 점에 탄복한 개스비가 한번 더 양보하여 40만원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요즘 시세로 따지면 최소 1200억이 넘는 금액이다. 간송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급히 처분하였다. 그리고 비행기를 전세내어 안전하게 청자 상감 연지원양문 정병을 비롯한 문화재 20점을 일본에서 되찾아 왔다. 그 중 7점이 국보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 금동 계미영 삼존불(삼국시대 불상)- 평양의 3대 거부의 아들 김찬영은 화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많은 서화 골동품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김찬영은 끝내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수장품이 내놓았다. 역사를 지키는 일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며 부귀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에 불상은 '고적급 유물 보전 규칙'이라 하여 발견하면 신고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에게는 암암리에 거래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고 조선 사람에게는 불법 취득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래서 불상의 수장가는 모두 일본인이고 현재 일본 박물관에 있는 불상은 200점이 넘는다. 김찬영은 신라시대 불상을 10만원에 일본 시장에 내어 놓았으나 우리 민족의 유산을 지키려는 간송의 뜻을 알고 선뜻 7만원에 건내주었다. 김찬영도 귀한 삼존불을 일본 사람에게 넘기기는 싫었던 것이다. 삼존불을 제외한 나머지 수장품은 일본인에게 팔았다. 삼존불의 광배 뒷면에는 '보와위망부조귀인' 돌아가신 아버지 조 귀인이 연꽃세상으로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염원이 적혀있었다. 어렵게 구한 삼존불은 비밀리에 간직되다가 간송 사후 1962년 국보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금동 삼존 불감 (11세기, 국보 제73호)- 문화 매국노 이희섭은 조선 골동품계의 거상으로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조선의 불상, 석조물, 고려자기, 조선백자 등 1만 4천점을 일본 시장에서 판매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는 명품 조선백자를 소장하고 있는 장택상에게 접근하여 6천원 주고 산 백자를 일본에 가서 3만원에 팔아넘기는 등 장택상의 명품 백자를 감언이설로 빼돌려 일본인 야타카에게 팔아넘겼다. 이희섭을 통해 구입한 야타카의 백자는 현재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 미술관에 127점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중 12점은 국내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초국보급이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팔아 제 배 불리기에 급급한 이희섭을 경멸했지만 그가 총독부 몰래 갖고 있던 불감(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12만원에 구입했다. 간송의 전문 거간 신보는 불감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례비를 포기하고 15만원이었던 가격을 조절하였고 그것을 간송에게 말하지 않았다. 장택상에 소장했던 (불감 17.8cm, 불상 9.7cm로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불이 있으며 불감에서 불사을 꺼낼 수 있는 구조) 금동삼존불감은 간송과 신보의 노력으로 지켜졌다. 훈민정음 해례본 - 1940년 한남서림에 고서가 많이 쌓이자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는 국문학자 김태준이 있었다.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으로부터 가문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상으로 주셨다는 말을 듣게 된다. 김태준은 간송이 훈민정음을 오매불망 찾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이 소식을 간송에게 알린다. 그러나 김태준과 이용준은 당시 사회주의 지하조직에 몸담고 숨어다니는 처지여서 쉽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게다가 일제로부터 한글탄압이 갈수록 심해지는 시기여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극비리에 구입하는데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간송에게는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훈민정음을 건내는 값으로 1천원을 요구했지만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사례로 1천원. 이용준에게 1만원의 값을 지불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 정인지 등 8명의 집현전 학자에게 문자를 새로 만든 목적, 원리,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해례본을 만들게 했고, 해례본이 완성되자 1446년 새로 만든 글자를 '훈민정음'이라 반포하고 해례본도 함께 배포하였다. 간송이 수장하게 된 해례본의 원래 주인 광산 김씨 종택 궁구당의 현재 종손은 "출처가 우리 집인 것은 분명하나 전형필 선생이 그것을 밝혀주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책인지 몰랐다. 우리 집에 계속 있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해례본을 가져다 귀중한 책임을 알리고 잘 보관해 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했다. 이용준은 종손의 고무부로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그는 자금이 필요해서 이용준 임의로 간송에게 넘겼던 것이다. 결국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 되었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이라 여겨서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에도 품속에 숨겼고 잘 때에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이렇게 구한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 그리고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신윤복의 미인도#금동계미영삼존불 #정선의 압구정 신윤복의 월하정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금동 삼존 불감 상감청자운학문매병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Boycott Samsung! 일베충은 그냥가라. 2013.12~2015.05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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